[한국의 선비정신 34]아들 이름을 합격자 명단에서 지워버리다
한국한시협회포천지회장 리 효 종
포천신문 기자 / jun28258@gmail.com 입력 : 2006년 06월 30일
정갑손은 생김새가 웅장하고 수염이 아름다웠으며 도량 또한 넓었다.
여러 임금 대에 걸쳐 재상을 지냈으나 청빈하여 모아놓은 재산이 없었다.
무명베 이불과 창포 자리를 깔고 거처하면서도 그것으로 편안히 여겼다.
그가 대신으로 있을 때 이조(吏曹)에서 사람을 잘못 천거하여 벼슬을 준 일이 있었다.
그때 하연(河演)은 이조판서였고, 최부(崔俯)는 이조참판이었다.
어느 날 임금을 모시고 조회를 하고 있었는데 마침 하연과 최부가 곁에 서 있었다.
정갑손이 두 사람을 가리키며 임금에게 아뢰었다.
“최부 같은 사람은 족히 헤아릴 것도 못되고, 그나마 하연은 사리를 알 마한 사람인데 사람을 잘못 등용했으니 청하건대 하연을 국문하시옵소서.”
이에 하연과 최부의 얼굴이 창백하게 일그러지고, 세종 또한 민망해 하며 어쩔 줄 몰라했다. 사정이 이러하자 세종은 하는 수 없이 웃는 얼굴로 양편을 화해시켰다.
조회가 끝나고 밖으로 나오자 하연과 최부는 물을 뒤집어 쓴 듯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정갑손이 빙그레 웃으며 두 사람에게 말했다.
“그대들을 해치려고 한 말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에게는 각자 맡은 직분이 있으니 그 직분을 다했을 뿐이오.”
그러고는 곁에 있던 관리를 불러 말했다.
“두 양반이 온몸에 열이 났으니 부채질 좀 해드리게.”
그러고는 태연히 궁궐 뜰을 걸어 나갔다.
대사헌으로 있을 때 조정 관원들의 모임이 있을 때면 사헌부와 사간원이 반드시 천막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웃하였다. 그래서 양쪽 관원들은 휘장을 걷고 술잔을 서로 주고받았다.
조정에서 금주령이 내렸을 때는 사헌부에서 법을 어긴 이들을 잡아 처벌하였으므로 엄격히 금주를 지켰다.
하지만 사간원에서는 몰래 술을 마시는 경우가 많았다.
어느 날, 모임이 있었는데 사간원 관리들이 술잔을 가득 부어 휘장 틈으로 사헌부에 술을 건네다가 그만 떨어뜨려 정갑손의 책상 앞에 멈추고 말았다.
모두 황공하여 어쩔 줄 몰라하며 감히 술잔을 치울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갑손은 모른 체하고 내버려 두었다. 이윽고 퇴근할 무렵이 되자 정갑손은 아전에게 물었다.
“저 거위알 같은 것이 무엇인가?”
아전은 모른채 하며 되물었다.
“무엇 말입니까?”
“저 잔 말이다. 저기에 수정구슬이 몇 개나 들어 갈 수 있을까?”
당시 사간원에는 아란배(鵝卵杯)하는 술잔이 있었는데 수정구슬 한되가 들어갈 만한 크기였다.
그러자 아전이 시치미를 떼고 답하였다.
“백 개는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갑손이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사헌부에는 필요없는 물건이니 들어왔던 틈으로 다시 던져 버려라”
모든 사람들이 조마조마해 하며 이 모습을 지켜보다가 그의 아량에 탄복하였다.
그가 함길도 감사로 있을 때였다.
마침 조정에서 불러 말을 타고 도성으로 가는데 길가에 커다란 방(榜)이 붙어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자신의 아들 우(?)가 과거 합격자 명단에 들어 있었다.
아들 이름을 확인한 정갑손의 얼굴이 갑자기 일그러졌다.
그는 서둘러 말을 몰아 도성에 도착한 후 곧바로 시관(試官)을 찾아갔다.
시관이 막 자제가 과거에 합격한 것을 축하하려 하자 정갑손은 그를 꾸짖으며 소리쳤다.
“늙은 놈이 감히 나에게 여우처럼 아양을 떠는구나. 내 아들놈은 아직 공부가 되어 있지 않거늘 어찌 임금을 속이고 과거에 합격시켰느냐!”
그러고는 그 자리에서 아들 이름을 지워버리고, 마침내 시관도 파면하였다.
정갑손(鄭甲孫)
? ～ 1451(문종1)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인중(仁仲)으로 세종의 후궁인 소용 정씨(昭容 鄭氏)의 아버지다.
1417년(태종17) 식년문과에 동진사로 급제한 뒤 두루 벼슬을 지냈고 1435년 (세종17)에 강직한 성품을 인정받아 좌승지로 발탁되었다. 이후 예조참판을 거쳐 1438년에 전라도 관찰사로 나갔다.
1441년 대사헌에 올라 충직하게 직무를 수행함으로써 세종의 신임을 받았다. 그뒤 경기도와 함경도의 관찰사, 중추원사,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등을 지낸 뒤 우참찬을 거쳐 1450년(문종 즉위년)에 좌참찬이 되었다.
중종때 청백리로 뽑혔으며, 시호는 정절(貞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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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신문 기자 / jun28258@gmail.com 입력 : 2006년 06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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