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럼

김보한

수필춘추 제4회 문학상 수상작 ‘부끄럼’이다. 포천출신 작가로서 교직생활을 은퇴한 후 글쓰기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김보한 작가의 작품을 게재하는 것은 최근 부끄럼을 잊고 살아가는 세태에 경종을 울리기 위함이다.

여러 해 전 낮선 시골에서 목적지로 향하는 길을 잃고 난감하여 머뭇거리고 있을 때, 마침 연세 지긋한 아주머니 한 분을 만난 적이 있었다.

타관에서 가까운 일가 친척이라도 찾은 듯이 급히 다가가니 그 분의 표정도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런데 그 때 나의 물음에 흡족한 답을 못 준 것이 꼭 자기의 잘못인 것처럼 몹시 미안해하고 얼굴에는 엷은 홍조까지 띠면서 부끄러워했던 그 아름다운 모습을 나는 이제껏 잊지 못한다.

공원을 산책하다가 가끔 아베크족들의 정다운 모습을 바라보노라면 나의 마음도 덩달아 젊어지는 것 같고 밝아옴을 느끼게 된다.

젊은이들이 구김살 없는 사랑을 스스럼없이 나누는 광경은 푸르게 자라는 수목처럼 우리 주위를 싱그럽게 하고 아름답게 만든다.

상상해 보라.

점잖은 노인들만이 오가는 거리를...... 거기에는 조용함과 사려 깊은 신중함은 있을지 모르지만 생기발랄한 분위기는 결코 기대할 수 없으리라.

아마 때로는 침울함과 침체된 공기만이 떠돌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중인환시리에 젊은이들이 애무의 농도를 조금이라도 짙게 하면 이번엔 모두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야 만다.

더구나 요즘에 와서는 미성년인 고등학교 남학생이 교복 차림으로 여학생의 어깨를 감싸안고 활보하는 모습을 심심찮게 보게 되는 데에 이르러서는 머리가 혼란스러워진다.

우리의 청소년 문화가 그만큼 발전한 것인지 혹 퇴보한 것인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네 할아버지와 아버지 세대 때에 내외가 동행하는 모습은 남남이 걷듯 멀찍이 떨어져서 꼭 금방 싸운 사람들 같았었는데, 확실히 근래의 "젊은 풍속도"는 너무 대담하고 화려하다.

해방 이후 밀려든 서구 문물의 영향을 받아 급속히 진행된 성 개방의 풍조는 이제 우리나라가 주도하는 느낌이 든다.

영상 매체인 영화나 TV드라마 작품을 통하여 남녀간의 불륜이 무차별하게 거리낌없이 방영되더니, 급기야 지상파 TV 화면에 젊은 연예인들이 일부러 아랫도리를 알몸으로 드러내기까지 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목하 우리나라는 연예계뿐만 아니라 정계, 재계, 교육계 등 온 사회와 문화에서 부끄럼이 사라져 가는 세상이 되었다.

장구한 인류의 역사 속에서 "부끄럼"이 최초로 언급된 곳을 찾아본다.

[아담과 그 아내 이 둘이 다 알몸이었으되 서로 부끄러워하지 않더라.

그런데 그 뱀이란 것은 하느님께서 만드신 온갖 들짐승보다도 무척 꾀 있는 것이었으니, 그것이 이 여인에게 말을 걸어 "하느님께서 너희더러 "너희는 이 동산의 어느 나무에서든지 따먹지 말라" 이르셨다하니, 정말일꼬" 하매 이 여인은 그 뱀에게 답하되 "이 동산의 나무 열매들을 우리가 먹을 수 있기는 하나, 동산 한가운데에 있는 나무 열매에 대하여서는 "너희가 죽지 않으려거든 너희가 거기에서는 도무지 따먹지 말라, 거기에 손을 대지도 말라"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하니라.

또 그 뱀이 이 여인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예 죽을리는 없고, 도리어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의 눈이 열리고, 너희가 하느님과 같이 되어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리 말씀하신 것이다"하니라. 이에 이 여인이 그 나무를 바라보매 먹음직하고 두 눈에 썩 들며, 또 영리하게 해 줄 것 같아서 그 열매를 따서 먹고, 또 저와 함께 있는 제 사내에게도 주니 그도 먹으니라.

그때 저들 둘의 눈이 열려 자기들이 알몸임을 깨닫게 되매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서 자기   들의 두렁이를 만들어 띠니라.

낙원에 살던 아담과 하와가 뱀의 형상을 빈 악마의 꾐으로 하늘이 금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고 그곳에서 쫓겨나게 되는 대목을 인용하여 보았다.

예서 나의 궁금증을 자아내는 것은 "왜 똑같은 알몸인데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부끄럽지 않던 남녀가 그것을 먹은 뒤에는 부끄러워했을까"와 "선과 악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이다.

성서를 깊이 연구한 신학자들의 해설을 들으면 "역시"하고 곧 의문이 풀린다.

벌거숭이 남녀는 선악과를 먹기 전에도 동서(同棲)하였음을 전제로 할 때, 죄짓기 전에는 비록 관계를 가졌더라도 "정욕의 부조리한 충동"(이성과 감성이 조화되지 않은 상태)이 없었기에 부끄럼이 일지 않은 것으로 보는 것이다.

예서 "부조리한 충동"이란 남(하느님)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상식 선을 넘는 행위임을 금방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선과 악이란 단순히 순명(順命)과 불순명을 가리킴이니, 불순명에 뒤이어 부끄럼이 일었다는 것은 그들의 정욕이 과도하게 분출되었음을 느꼈기 때문인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에 덧붙인 순전한 나의 관견(管見)인데, 이 부부가 외부의 유혹으로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은 곧 이때로부터 인간의 영혼 속에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는 선함과 이를 거스르려는 악함이 동시에 내재하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모든 인간은 죽는 날까지 각자 자기 내부의 악과 싸우느라고 갈등하고 고뇌하는 괴로운 존재로 전락한 것이다.

D.H.로렌스는 선악과를 일단 지혜의 열매로 보고, 인류의 원조가 이를 먹음으로써 지혜의 독(毒)이 들어오게 되어 "남녀 관계"를 맺음도 비로소 죄가 된 것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야생 동물적 순수한 피의 세계가 영(靈)의 침범을 받아 이때부터 인간 내부에서는 "피와 영"이 교차되는 십자가를 스스로 걸머지게 되었다고 했는데, 이는 그의 특이한 생애에서 비롯한, 독특한 개성이 빚어낸 예술적 시각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우리 집안에는 10대 조모인 나씨(羅氏) 할머니에 관한 이야기가 전설처럼 이어지고 있다.

10대 조부는 상당한 미남자(족보에 전하는 초상화로 알 수 있음)인데 반하여 그 할머니는 엄청나게 추한 박색이었다.

그러기에 신랑은 초례(醮禮)하는 날 밤에 어찌나 놀랐던지 한걸음에 제 집으로 도망가고 말았다.

그 후 신부의 지혜로 신랑과 화합하여 6형제를 낳게 되고 그들을 모두 대성케 하였다.

우리나라 고대 소설을 연구한 어느 국문학자의 저서를 읽은 적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나씨 할머니를 "박씨전"의 주인공인 박씨의 모델로 보고 있는 것이다.

물론 박부인이 도술을 부리거나 미인으로 환골탈태하는 장면들은 순전히 소설적 허구였다.

그런데 이 할머니의 가르침이 우리 김문(金門) 며느리들에게 지금껏 연면히 전하고 있으니, "남녀간의 사랑은 숯불과 같은 것인고로 여자가 슬기롭게 다루라"는 한 말씀이었다.

어느 저명한 연애론의 대가는 부끄럼의 4분의 3은 후천적이라면서, 부끄럼은 사랑에다 상상력이라는 구원병을 파병(派兵)함으로써 거기에 한층 생명력을 불어넣게 된다고 하였다.

감성의 메카니즘으로서 이보다 단순한 것도 없기에 인간의 영혼은 쉬 부끄럼에 사로잡혀 과도하게 분출하는 욕망을 적절히 제어할 수 있는 것이다.

하등동물들에게서 도무지 부끄럼을 찾아볼 수 없음은 이것이 얼마나 고차원적 사랑의 미학인지를 알게 한다.

단 그 과장이나 가장(假裝)은 금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