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포천시협의회 주관으로 지난 9일 북한 개성시에 위치한 박연폭포와 관음사, 숭양서원, 선죽교, 고려박물관 등을 다녀왔다. 9일 새벽 5시경 개성을 방문하기로 한 민주평통 포천시협의회 소속 위원들과 포천시 경우회 회 회원 등 32명이 호병천에 주차되어 있는 버스에 탑승하기 시작했다. 5시20분경 방문단이 탑승한 버스는 파주를 향해 떠났다. 버스에 탑승한 사람들은 개성이라는 도시를 방문한다는 것보다 북한 땅에 들어간다는 것에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듯 싶었다. 포천을 출발한 버스는 6시20분경 파주 임진강역 부근 주차장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현대 아산측이 준비한 버스로 갈아타고 남측출입사무소에 들어섰다. 남측출입사무소에서는 내국인이 외국을 방문하기 전에 받는 절차처럼 검색대를 통과해야만 한다. 검색대를 통과한 후 방문객들이 소지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 물건, 즉 휴대폰(PDA 포함)이나 필름카메라, 캠코더(광학 24배줌 이상), MP3, 남측관련 신문 및 인쇄물 등은 남측사무소에 맡겨놓아야 한다. 남측출입사무소를 통과한 후 방문단은 출입사무소의 식당에서 설렁탕과 북어국 중에서 아침식사를 할 수 있었다. 아침 식사후 현대아산 측에서 마련한 버스를 타고 북한 땅으로 이동하기 시작한 것은 오전 8시경, 북으로 가는 현대아산 직원들이 손을 흔들며 잘 다녀와라는 인사한다. 그리고 차창 밖으로는 한국군이 무장한 채 바리케이트를 설치하고 이동하는 차량을 통제한다. 북한지역에 들어가자 방문단을 안내하는 건장한 남자 2명이 차량에 탑승했다. 차량에 탑승한 북한 안내원은 차량내에서는 사진촬영을 해서는 안되고 규정된 관광지내에서는 사진촬영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말하는 등 관광하는 동안 주의 사항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러는 동안 차창밖으로 남과 북의 냉전시대의 상징물인 대성동 마을에 높이 치솟아 있는 태극기와 북한 기정동 마을의 인공기가 한눈에 들어왔다. 대성동 마을은 1953년7월 정전협정 이후 지난 55년 동안 남한의 최북단 지역으로 북한과 맞닿는 비무장지대의 유일한 마을이다. 또 8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북한의 최남단이라고 하는 기정동(일명 선전마을) 마을이 눈에 들어온다. 대성동 마을의 태극기는 철탑 높이가 100여 미터가 되는 높은 곳에서 휘날리고 있고 북한 인공기는 기정동 마을에 세워진 160여 미터의 철탑 위에 게시되어 있다. 하늘 높이 솟아 있는 태극기와 인공기가 없었다면 남북분단이 구분이 될 정도로 군사분계선 지역은 평온하기만 했다. 북한 땅으로 들어 왔다고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차창 밖으로 보이는 인민군 초병들의 모습이 보이면서다. 인민군들의 모습은 방금 남측 바리케이트를 설치하고 있는 군인들과 많이 달라 보였다. 먼저 외형상 키가 작고 얼굴은 햇빛에 많이 노출되어서인지 검게 그을린 모습을 하고 있다. 북한군 초소를 서너 차례 지나자 차창 밖으로는 남한의 울창한 산림과 다른 들과 산이 눈에 들어온다. 먼저 산에는 나무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큰 나무가 보이지 않았다. 버스에 동행했던 일행들은 북한 주민들이 산에 있는 나무를 연료로 사용했기 때문이라는 말이 여기저기에서 나온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개성공업단지가 한 눈에 들어왔다. 언론매체를 통해서만 접했던 개성공단이라는 표지판에 먼저 눈이 간다. 눈에 들어온 개성공단의 이미지는 평소에 거대한 면적의 공단 이미지는 아니었다. 현 정부의 대북 관계 정책이 경색국면이라는 점을 감안하면서 바라본 개성공단은 활발하게 운영되지 않아 보였다. 개성공단을 지나 박연폭포로 가는 길가에 나와 있는 북한주민들을 볼 수 있었다. 길거리를 걷는 북한 주민들의 모습은 웃음기 없는 차가운 얼굴에 옷차림은 세련되지 않아 보였다. 방문단 차량을 신기한 듯 바라보는 주민들, 일부이기는 하지만 손을 흔드는 주민과 어린 학생들도 눈에 보였다. 또 방문단이 탑승한 차량이 지나가는 길목마다 북한 군인들이 차렷자세로 차량을 바라보고 있었다. 차량으로 이동하는 동안 북한 안내원은 “한민족이기 때문에 여러분은 이곳이 낯설지 않고 고향에 온 듯하게 마음이 편안할 것이다”면서 “관광하는 동안 불편한 사항이 있으면 이야기 해 달라. 도움이 될 일은 얼마든지 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첫 번째 목적지인 박연폭포와 관음사, 선죽교, 고려박물관 등에 관해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차량에 탑승한 사람들의 반응이 썩 좋지 않았든지 북한 안내원은 스스로 노래 한 곡하겠다고 먼저 나섰다. 그리고 ‘고향의 봄’을 반주 없이 불러댄다. 그리고 앵콜이라는 말이 나오자 북한의 노래인 듯한 노래로 답한다. 그러는 동안 박연폭포 관광지 입구에 도착했다. 처음 출발할 때와는 달리 5천명이 한꺼번에 여러대의 차량에서 쏟아져 내렸다. 박연폭포 입구에는 남한의 어느 시골마을처럼 한적해 보였다. 차량에서 내린 관광객들은 모두들 신기한 듯 관광지 안내 표지판을 바라보고 박연폭포를 향해 걸어 올라간다. 박연폭포로 향하는 사람들은 나이가 많이 든 노인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젊은 층과 어린이들도 가끔 눈에 띠었다. 박연폭포에 이르자 음료수와 빵, 그리고 과자를 판매하는 판매점이 있고 젊은 한복 차림의 여성이 이것저것을 권한다. 폭포를 배경으로 사진촬영 할 때는 북한 안내원이 함께 사진을 찍기도 한다. 박연폭포를 지나 관음사라는 절을 향해 올라가다 보면 지나가는 길가에 바위가 많다. 바위마다 북한체제를 옹호하는 말들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 그것도 작은 바위에서 큰 바위까지 이름이 새겨져 있다. 북한안내원들은 언제 바위에 새겨진 것은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에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이 바위에 자신의 이름을 새겼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관음사는 크지 않는 아담한 절이다. 삭발하지 않는 스님 한 사람이 방문객들이 기도를 할 수 있도록 안내할 뿐이다. 종교의 자유가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관음사는 상징적인 것처럼 보였다. 박연폭포와 관음사 관광을 마치고 버스가 있는 곳에 내려왔다. 버스에 탑승하라는 안내원의 말에 따라 5천명이나 되는 관광객들은 한꺼번에 여러 대의 버스에 오른다. 그리고 숭양서원과 선죽교, 숭양서원은 고려말 충신 정몽주를 기려 세웠다는 사당이다. 숭양서원에 이르자 북한 안내원은 정몽주가 고려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린 것과 이성계가 고려 충신들을 죽인 이야기, 즉 숭양서원에 관한 이야기를 자세하게 설명한다. 숭양서원은 정몽주를 기린 사당이 있는데 남한의 개축하거나 새롭게 건축한 모습이 아니라 기존 목조건축물을 그대로 보존한 것처럼 보였다. 이곳에서도 한복 차림의 여성안내원들이 숭양서원과 선죽교에 관한 내력을 자세하게 설명한다. 관광객들은 이곳저곳을 바라보고 사진촬영에 여염이 없다. 선죽교는 개성 남대문에서 동쪽 약 1km 거리의 자남산 남쪽 개울에 있는 다리이다. 태조 왕건이 919년(태조 1) 송도(현재 개성)의 시가지를 정비할 때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선죽교는 고려 왕건 때 축조된 것으로 길이 8.35m, 너비 3.36m의, 화강석으로 축조된 전형적인 널다리이다. 고려시대에는 돌난간이 없었는데, 1780년(정조 4) 정몽주의 후손들이 난간을 설치했다고 한다. 선죽교는 조선 태조 즉위 때 정몽주가 이방원의 일파에게 피살된 장소로 유명하다. 원래 선지교(善地橋)라 불렸는데, 정몽주가 피살되던 날 밤 다리 옆에서 참대가 솟아나왔다 하여 선죽교(善竹橋)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선죽교는 흔히 TV사극에서 본 것처럼 큰 교량은 아니다. 또 하천은 작아 보였다. 역사의 유물이기 때문에 관심을 보이기는 했지만, 관광객들은 별것 아니라는 반응들이 많았다. 숭양서원과 선죽교 관광을 마친 방문단은 개성시 남대문을 거쳐 조선시대 건축물을 개조해 만든 민속식당 거리로 향했다. 시가지를 지나가는 동안 방문단 차량을 보고 손을 흔드는 주민들과 학생들도 간혹 눈에 띤다. 그러나 길거리를 지나가는 차량들은 거의 없다. 차량이 없어서인지 시가지 교차로에도 신호등이 없고 교통 통제하는 안내원이 있을 뿐이다. 민속식당 거리에 들어서자 옛 건축물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서 있고, 이러한 건축물을 개조해 음식점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점심메뉴는 북한 전통음식 차려져 있었다. 남한의 육고기가 아니라 나물과 채소 등이 주류를 이룬다. 음식점에서는 북한산 술을 구매해 마실 수 있고 휴대할 수 있다. 식사 후 북한 물건을 판매하는 곳으로 향했다. 이곳에서는 북한에서 만든 장신구류나 그림, 서적들을 판매하고 있다. 규모는 10여평 남짓, 크지는 않지만 북한 유명화가가 그렸다고 하는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그림은 표구를 하지 않는 채 그림만 판매하는데 우리 돈으로 6만원 혹은 7만원 정도에 판매하고 있다. 북한 서적을 남한 방문객에게 판매한다는 것도 의아스러웠지만 이런 서적을 가지고 올 수 있었다는 게 과거와는 많이 달라진 남북관계를 인식할 수 있다. 이제 마지막 방문지인 고려박물관으로 이동했다. 1988년에 개관했다고 하는 고려박물관은 고려시대의 사적인 성균관의 건물과 그 부지를 이용해 건축했다고 한다. 박물관에는 고려의 역사·경제·과학·문화의 발전 모습을 보여주는 1,000여 점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고 성균관 건물 18채로 꾸며진 전시실은 모두 4개의 전시관으로 되어 있다. 전시관에는 고려시대의 개성 지도, 고려의 왕궁이었던 만월대의 모형, 왕궁터에서 출토된 꽃무늬벽돌 등과 고려 제11대 왕인 문종의 능에서 발굴한 금동공예품 등 고려시대의 화폐인 해동통보 등 고려의 성립과 발전의 역사를 보여주는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또 과학기술과 문화의 발전상을 보여주는 금속활자, 고려첨성대 자료, 청자를 비롯한 고려자기 등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야외 전시장에는 불일사오층석탑, 흥국사탑, 헌화사칠층석탑, 현화사비, 개국사 석등, 원통사 부도 등의 조각 작품이 전시되어 있으며, 이밖에도 활쏘기터·그네터·널뛰기터·씨름터 등 민속놀이를 즐길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이곳을 관람하는 동안 북한 안내원들은 남한의 정치 상황에 관심을 보이면서 말을 걸어왔다.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간에 갈등관계가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그러면서 남한내에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대한 국민들의 감정 등 국내 분위기에 알고 있는 듯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오후 4시까지 고려박물관 관광을 마친 방문단은 다시 북측 출입사무소를 향해 떠났다. 이곳을 향해 가는 동안 개성시 길거리 모습, 북한 주민들의 얼굴표정, 농경지 등을 회상해 봤다. 전신주와 차량이 거의 없는 길거리와 굳은 표정의 북한 주민들, 농작물이 자라지 못하고 있는 척박한 농경지, 나무가 없는 산 등이 하나의 영상 필름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이러한 회상이 끝나기 전에 출입사무소에 도착했고 검색대를 통과하는 동안 관광지에서 촬영한 디지털 카메라를 확인하는 절차를 거쳤다. 4시30분경에 북한 출입사무소를 통과했지만 방문단을 태운 버스는 그대로 멈춰 서있었다. 개성을 오고가는 남측 기술자들과 방문객들은 오후 5시 정각에 모두 빠져나가야 한다는 원칙 때문이었다. 30여분을 기다리자 남측 기술자들이 탑승한 것으로 보이는 트럭과 승합차량 10여대와 관광객을 태운 차량들이 한꺼번에 남측 출입사무소를 향해 출발했다. 남측 출입사무소와 포천까지 오는 동안 내내 개성시가지와 북한 주민들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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