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한시협회 포천지회장 리 효종
곽재우(郭再祐 1552~1617)의 본관은 현풍(玄風)이고, 자는 계수(季綏), 호는 망우당(忘憂堂)이다. 의주 목사 곽월(郭越)의 아들이고, 남명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문무에 모두 뛰어났으며 선조 18년(1585)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했으나 글귀 중에 왕의 뜻을 거스리는 구절이 있다는 이유 때문에 파방되어 합격이 취소된 후로 과거 공부를 버리고 죽장망혜(竹杖芒鞋)로 강산을 유람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마을에서 의병을 모으고 사재를 털어 의병 70여명의 군량을 부담하였다. 곽재우는 이 70여명을 이끌고 정진(鼎津)과 함안(咸安)에서 왜병을 기습하여 적의 수급 50여개를 가져오는 전과를 올렸다.
그 뒤부터 곽재우의 의병은 점점 불어났으며, 싸움이 있을 때마다 그는 붉은 전포를 입고 항상 앞장 서서 싸워 승리를 거두었으므로 왜병들에게ꡐ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ꡑ으로 널리 알려졌다.
왜병의 두 번째 침략인 정유재란 때의 일이다. 이웃한 고을들이 왜병의 총칼 앞에 다 무너졌는데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지키고 있던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곽재우만이 고집스럽게 성을 지키고 있는 것을 본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이 곽재우에게 성을 포기할 것을 종용했다. 끝까지 버틸 수는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곽재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옛적 전국시대에 제(齊)나라는 70여개 성(城 : 도시)이 모두 함락되었지만 즉묵(卽墨 : 제나라의 도시명)은 온전했고, 또한 당나라 군사 100만이 안시성을 공격했지만 안시성은 무너지지 않고 버티었습니다. 다른 군(郡)들이 힘없이 무너진다고 해서 우리의 성을 포기하란 말입니까?"
그는 화왕산성을 끝내 지켰다. 그 해 그는 계모 상을 당하여 고향인 울진으로 내려가 3년상을 마친 뒤에 두문불출하고 자제들과 함께 패랭이를 만들어 팔면서 그것으로 생계를 꾸렸다.
선조 33년(1600)에 조정으로부터 진주 목사 겸 경상도 조방장에 임명되었으나 그는 영창대군의 처리에 강력히 항의하는 글을 올린 뒤, 대간 홍여순(洪汝淳)의 탄핵을 받고 영암으로 유배되었다. 그 뒤에 함경도 관찰사, 한성부 좌윤 등의 벼슬을 받고 자신의 경륜을 한번 펴보려고 노력해 보았지만 워낙 혼탁한 조정에 실망하였다. 그리고 다시 은둔생활로 들어가 일체의 화식(火食)을 먹지 않고 오직 솔잎만 먹으면서 지냈다. 다시 벼슬길에 나가야 한다는 권유를 받으면 그는 늘 이렇게 말했다.
"고양이를 기르는 것은 쥐를 잡기 위함인데, 왜적이 물러간 지금 내가 할 일이 도무지 무엇인가?"
선도(仙道)에 심취하여 비슬산(琵瑟山)에 들어가 도가의 방술을 연구했다. 얼마 후엔 취산(鷲山)의 창암(蒼岩)에 들어가 ?망우당(忘憂堂)?이란 현판을 걸고 신선처럼 살았다고 전한다. 오봉(五峯) 이호민(李好閔)이 곽재우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보냈다고 한다.
내가 들으니
홍의장군은
왜놈들 쫓기를
노루 쫓듯 했다지요
그대에게 말하노니
끝내 나라 위해 진력하시고
저 유명한 곽분양처럼
부귀도 누리소서
문도홍의장(聞道紅衣將) 축왜여축장(逐倭如逐獐)
위언종륙력(爲言終戮力) 수사곽분양(須似郭汾陽)
*註) 곽분양(郭汾陽) : 당나라 곽자의(郭子儀). 나라에 끼친 공로가 커서 분양왕(汾陽王)에 봉해졌으므로 곽분양으로 불림. 공(功)과 부(富)와 귀(貴)를 한몸에 지닌 사람의 대명사처럼 후세에 널리 인용되는 사람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