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한시협회 포천지회장 리 효종
박태보(朴泰輔): 1654년(효종5)~1689년(숙종15),자는 사원(士元), 호는 정재(定齋), 본관은 반남, 판중추부사 세당(世堂)의 아들.
아버지 세당은 실학파의 대학자로 유명한 사변록(思辨錄)을 저술하자 주자학파(朱子學派)로부터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 탄핵되어 삭탈관직되고 유배도중 죽었으나 곧 신원되었다.
1667년(숙종3)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장원급제하여 예조좌랑, 홍문관 교리, 암행어사 등을 역임하였다.
1689년(숙종15) 기사환국(己巳換局․․․숙종이 장희빈의 아들을 원자[元子]로 책봉하려하자 서인인 송시렬(宋時烈)이 시기가 빠르다고 반대하자 실각되었던 남인들이 송시렬 등은 왕명을 거역하는 불충한 무리라고 서인을 탄핵, 왕을 충동하여 대옥사를 일으켜 서인을 축출하고 마침내는 인현왕후를 폐위시키고 장희빈을 왕비로 삼자 이를 반대하던 영의정이었던 김수항과 송시렬을 사사케한 사건)이 일어나자 박태보는 벼슬을 버리고 집에 있다가 동지들과 더불어 소를 올려 강력히 항의하자 숙종이 대노하여 전정(殿庭)에서 국문하는데 살이 터지고 뼈가 부러져도 추호도 흔들리지 않고 인현왕후를 폐위시켜서는 아니 된다고 항거하였다.
금천(衿川)으로 귀양가다가 노량진에 이르러 죽었는데 나이 36세였다. 시호는 문렬(文烈)이다.
왕이 잘못하는 것을 보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직간(直諫)하던 우리 옛 선비들의 기개, 이것이 한국의 선비정신이다. 이 선비정신이 있었기에 조선조가 500년의 사직을 유지했던 것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이 절윤 하였고 문예(文藝)가 일찍 이룩되었으며 강단(剛斷)이 지나쳤으므로 남들은 너무 지나치다고 하였다.
급기야 장성해서는 스스로 반성하여 말과 행동을 조용히 하매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그는 시(詩), 서(書), 사서(四書)와 송유(宋儒)의 글에 전력하여 정미한 경지에 이르렀으며 그의 문장은 현달하였다.
27세에 수찬(修撰)이 되었을 때 제학사 중의 으뜸이 되었음으로 소장(疏章), 논술(論述)에 있어서는 모두가 태보에게 사양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태보는 뜻이 고상하고 식견이 투철하며 몸가짐이 엄격하고 경전에 전력하고 주역에 통달하여 경연(經筵)에서 서슴치 않고 이론을 전개하여 모든 학사들이 감복하였다.
태보가 죽은 뒤 숙종이 후회하며 벼슬을 돌려줬고 사림(士林)이 노량(露梁)과 파주(坡州)에 서원을 세워 그의 충절을 기렸다.
유저로는 정재집(定齋集) 14권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