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조 임지왜란이 일어나자 신급선생은 혼자 집에 남아 노모를 모시고 있었는데 강원도 이천으로 피란을 가던중, 갑자기 왜적을 만나 어머니께서 낭떨어지에 떨어져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자 크게 통곡하여 울부짖었다.
ꡒ형은 왕을 호종하고 두 동생은 왜적과 싸우다가 죽고 나는 어머님을 모시다가 내가 잘 모시지 못하여 어머님 생명을 보존하여드리지 못한 중재(重罪)를 졌으니 내 어찌 살아 있겠느냐?ꡓ
하고는 낭떨어지에서 떨어져 죽었다.(나중에 보니 어머님은 살아계셨다.)
신급님은 1554년(명종9년)~1592년(선조25년) 내 고향 포천 내촌면 내리에서 출생하시어 효자정려(孝子旌閭)를 받으신 명문가의 효자이시다.
선비의 가정의 최고의 영예를 받으신 것이다. 효자정려를 하사받은 가문은 벼슬길은 물론 명문가의 문벌로 사회적대우로 융성하였던 시대였다.
신급님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문을 즐겨하셨으며 경서(經書)를 통독(通讀)하고 학식과 기개가 높은 학자였다.
선조조 월곡선생과 성흔선생이 동서붕당으로 논쟁이 심할 때 동인의 중진인 박근원의 무리에게 탄핵을 받고 조정을 떠나게 되자 신급님이 이 상항을 보고 유생 수십명을 이끌고 동인의 무리가 당리 당략(黨利 黨略) 만을 위하여 어진 선비를 모함하는 부당한 행위임을 강력 상소하였으니 임금이 이를 받아들여 율곡,우계(성흔) 선생이 조정에 복귀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당시 율고이나 우계를 탄핵한 박근원은 대사헌의 자리에 있었으나 신급님의 기개가 선비의 기상을 잃지 않은 충성심은 임금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였던 것이다. 맏형 신잡(申?)님은 임진왜란시 선조임금을 의주 까지 호송한 호종공신이었다. (병조판서,평천부원군)
동생 신입(申立)님은 무관으로 병마정도사 한성판윤을 역임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수변사로 왜적과 전투하다가전사한 용장이었다. 막내 할(?)은 수어사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진강 전투에서 전사 순국한 장수였다.
공신(功臣), 충신이자 무훈에 빛나는 형제를 두었으며 효자였던 신급님의 명문가의 효자 정려는 내 고향 포천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정유재란 등 국란(國亂)을 당하여 자기의 부모도 버리고 임금도 버리고 도망질치는 무리들이수도 없이 많았던 시절, 여러 형제들이 임금을 모시고 나라에 충성하여 적을 맞아 죽음으로 나나를 수호하였으며 부모에게 효도한 신급님의 가정이야 말로 내 나라 내 고장의 명문거족(名門巨族)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선비의 최고의 덕목인 살신성인( 殺身成仁)의 혈통을 이은 본 받을 명문가임을 재삼 강조해 둔다. 지역 교과서는 물론, 청사(靑史)에 길이 빛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