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이 점점 포악해지고 사회가 문란해지자 민심도 등을 돌렸다.
마침내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집안 사람들이 홍언충에게 충고하였다.
“당대에 이름을 날리던 이장곤 같은 사람도 도망갔는데 그대는 어찌 지금까지 피하지 않는가?”
이장곤(李長坤)은 김굉필의 제자로, 갑자사화가 일어날 때 홍문관 교리로 있었다.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거제도에 유배되었는데, 연산군은 무예와 용맹이 있는 그가 변란을 일으킬까 두려워 처형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장곤은 이를 눈치채고 함흥으로 달아나버렸다.
집안 사람들이 도망칠 것을 권고하자 홍언충은 이를 무시하며 말했다.
“인륜에 다섯가지가 있으니 부자관계가 그 첫 번째요, 군신관계가 둘째입니다. 아버지는 벌써 세상을 떠났으니 가장 중한 것은 다만 군신의 의리가 있을 뿐입니다. 지금 만약 몸을 피한다면, 이는 아버지도 없는데 임금까지 잃게 되는 셈입니다. 내 어찌 임금을 팽개치고 도망치겠습니까?"
얼마 후 의금부서에서 들이닥치자 그는 조용히 그들을 따라나섰다.
그는 옥에 갇혀 갖은 고문을 당하였다.
이윽고 심문이 끝나자 그는 다른 사람의 부축을 받고 옥에서 나왔다.
그러나 몇 걸음 걷지 못하고 담 아래 앉아 잠시 위었다.
그때 김안로가 다가와 피가 얼룩진 그의 옷을 보고 가엾게 여겨 그것을 가리키며 말했다.
“참으로 가혹하구나!”
그러나 홍언충은 가만히 웃으며 답하였다.
“이것은 홍문관의 물이 든 것이오.”
이는 홍문관의 탄핵으로 고문을 받아 핏물이 배인 것이라는 의미였다.
고문을 당한 후 그는 귀양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갔는데, 그때 김안로는 교외까지 그를 전송하였다.
홍언충이 고통스런 낯빛을 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학문을 배운 화(禍)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이에 김안로가 희롱하여 말했다.
“그러면 자네한테 지혜와 학식을 빼앗으면 어떻겠는가? 눈이 어두워 좋고 나쁜 것을 가리지 못하고, 콩과 조를 서로 섞어 아무것도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면 좋지 않겠는가?”
그말에 홍언충이 답했다.
“무슨 말인가? 떠돌아다니는 사람들 중에 혹시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는 것은 학문 때문이고, 갖은 고생을 다하며 양식마저 떨어졌을 때 사람들이 혹시 나에게 양식을 대주는 것 역시 학문 때문이네. 외딴섬에 귀양가 있으면서 마음이 괴로울 때 글을 쓰고 읽는 것이 아니면 즐거워할 일이 없으니 학문의 공은 큰 것이네. 남의 시기와 질투가 내 한 몸에 모여 화를 당하게 한 것도 학문이지만, 나로 하여금 선악을 가려내고 입으로는 옳고 그름을 말하게 한 것도 학문이네. 내가 다시 어리석은 자로 돌아가 편안히 밥만 먹는다면 하늘에서 떨어져 구덩이 속을 구르는 것이니 비록 엎어지고 자빠질지언정 내 어찌 학문을 그만 두리요.”
그는 귀양가다가 조령(鳥嶺)에 이르러 반정이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중종이 즉위한 후 이장곤 같은 사람은 벼슬에 나아갔으나 그는 끝내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그는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스스로 즐겁게 지내다가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나마 중종때 벼슬에 나가지 않고 연산군을 위해 절개를 지킨 사람은 홍언충이었다.
홍언충(洪彦忠)
1473년(성종4)~1508년(중종3)
본관은 부계(缶溪)이며 자는 직경(直頃), 호는 우암(寓菴)이다.
1495년(연산군1) 사마시에 합격하고, 그해에 또다시 중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498년 이조좌랑을 지낸 뒤 병으로 사임하였다가 1503년 수찬으로 복직하여 교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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