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 궁예와 포천 궁예(弓裔)는 신라 47대 헌안왕의 아들이라는 설과 헌안왕의 사위인 48대 경문왕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신라왕족의 후예라 알려져 있다. 삼국사기에 전하는 말에 의하면 5월 5일 외가에서 생하였는데 집위에 흰빛의 무지개가 생겨 하늘끝까지 뻗혀 일관(日官)이 왕께 아뢰기를 이아이는 중오일(重午日)에 생하고 광염(光焰)이 이상하여 이롭지 못하다 이르니 왕이 죽이라고 명했는데 중사(中使)가 그 집에 가서 강보(襁褓)의 아이를 뺏어 집어 던지니 그 아래에 있던 유모가 받다가 눈을 찔려 외눈이 되었다 전 한다.
그 후 유모에 의해 양육되어 10세에 영월에 있는 세달사(世達寺)에 들어가 입적하여 승려가 되어 미륵불(彌勒佛)이라 자처하게 되었다. 그후 기훤에 의탁하였으나 기훤이 박대하므로 경복원년 원주의 양길에 가니 대우가 좋았다.
895년 양길의 부하로 명주(지금의 강릉)까지 쳐들어가 공을 세우니 부하가 3,500명에 이르렀다.
이를 14개부대로 나누고 군기를 엄정히 하고 공(功)을 세우니 여러 부장들의 권유로 장수로 추대되었다. 그후 영월의 김순식을 손잡고 패서도의 평산 박씨세력을 안았으며 896년엔 송악의 왕건부자를 귀복케 하고 895년 궁예가 금성. 김화. 철원등을 점령하고 철원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후고구려라 하고 개원하니, 892년에 완산주에서 후백제를 세운 견훤과 함께 후삼국시대를 열게 되었으니, 이때 포천은 한산주의 견성군으로 사천현(沙川縣)과 동음현(洞陰縣)의 2개 영현(領縣)을 거느리며 궁예의 세력권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후고구려는 공주 청주를 연하는 지역의 북방을 지배하는 세력이 되었다. 그 후 청주의 아지태사건을 시작으로 시중 왕건과 틈이 생겼으며 궁예가 점차 난폭해지며 부인 강씨를 죽이고 보좌관, 관리까지 죄없이 죽이는 일이 자주 생기니 점차 민심이 궁예에게서 멀어져 가게되었다.
포천지역은 후고구려 초기에는 남방 후백제세력을 막는 지역으로, 그 뒤엔 궁예와 왕건이 각축을 벌이는 전장의 지역이 되었다. 영중면 태봉산성은 918년 궁예가 왕건에게 쫓겨가며 저항했던 지역이다.
이 성에서 왕건군과 싸우기 위하여 성을 수축할 때 백성과 군사들이 일렬로서서 북강에서 돌을 날랐다 한다.
궁예는 이 싸움에서 대패하여 패주동(敗走洞)을 지나 명성산에서 그의 도읍지 철원을 바라보며 산이 떠 나가도록 울었다하여 명성산(鳴聲山)이라 명명됐으며 강씨봉도 궁예의 첫부인을 귀양보낸사연에서 생긴 이름이며 국망봉도 강씨부인이 나라가 잘 되기를 매일 기원한데서 나온 이름이라한다.
운악산의 화성도 궁예군과 대치되었던 지역으로 대궐터가 있으며 축성의 흔적이 있다.
도마치(導馬峙)계곡도 말을 끌고 갈 정도로 험한 계곡이란 이 고개의 고유명사도 이 때 나온 말이다.
또한 관인면 지장산의 보개산성도 궁예의 애환을 담고 있다. 또한 포천의 반월산성도 궁예의 역사와 맥락을 같이 한다.
남방세력과 왕건세력과 대치될 때 수축했을 것으로 판단되며 구읍리 미륵불상도 궁예가 축조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포천지역의 산이름이 미륵불을 자처했던 궁예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불정산, 불무산, 지장산, 국망봉, 보가산등의 이름은 미륵신앙을 퍼뜨렸던 궁예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판단되어 진다. o 지방관제와 문화재
고려시대에는 5도 양계(兩界)제로 약 500개의 주현(州縣)이 있었는데 포천은 양광도에 속하며 포주와 동음현의 지역으로 어떤 때는 주현 혹은 영현으로 단련사가 나오기도 하고 때에 따라선 양주의 속현으로, 동음현지역은 동주의 속현으로 편입되기도 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문종때에는 경기도를 종전의 13개 군현에서 50여 군현(郡縣)으로 확장하였는데 이 때에 경기도에 편입되었다. 포천지역의 문화유적가운데 고려시대의 문화재는 아주 귀한 실정이다.
관인면의 보가산성지, 운악산 화성, 명성산성, 태봉성산지, 궁예가 세웠다는 구읍리 미륵불, 명종때에 세워진 포천향교, 이성계가 이자점의 모함으로 4년간 피해서 전장을 갖고 강무를 했다는 재피골(滓?洞)과 해룡산, 후궁 강씨부인이 생활했다는 철현의 궁말, 고려조의 공신 성여완, 성석린선생의 부자묘 등이 고려시대의 문화재이며 사찰로는 이동면의 흥룡사, 신읍동호병골의 왕산사등이 이 시대의 문화재이다.
포천지역은 후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는 궁예가 후고구려를 세우는 과정에서 지방호족들과의 전장의 지역으로, 삼국정립시대에는 견훤과의 각축을 이루는 전장의 지역으로, 고려의 건국과정에서는 궁예와 왕건이 각축하면서 왕건에게 패퇴하는 역사의 지역으로 고려왕업의 기초를 닦는 전쟁지역이 되었다.
*참조: 포천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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