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채산사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경기기념물 제30호. 1906년 최익현이 순국하자 유림들이 그의 우국충정을 기리기 위해 건립.
포천출신 면암 최익현 선생 서거 100주년을 맞아 면암최익현선생숭모사업회(회장 이구상)는 오는 10월중에 면암선생 순국 100주년 기념식을 개최하고 생가터를 알리는 기념비 건립, 면암 최익현 만화독후감 중 우수작 시상, 역사문화마을 가꾸기 사업추진, 기념관 건립 등을 추진해 나가기로 했다.
이같은 사실은 8월30일 오전10시30분 포천유림회관에서 개최된 임원회의에서 밝혀졌다.
이날 회의에는 회원들은 올해 10월 하순경에 대마도 방문보고와 만화책 독후감 시상식, 사업추진계획 보고 등 기념식을 갖기로 의결했다.
아울러 문화관광부에서 추진하는 문화·역사마을 가꾸기 사업으로 면암 최익현 선생 생가터를 중심으로 역사문화마을 가꾸기 사업을 신청하기로 했다.
문화·역사마을 가꾸기 지원사업은 마을의 문화·역사적 소재를 발굴·육성하여 자생력 있는 마을을 만들기 위해 문화관광부에서 추진하는 사업이며 대상마을로 선정되면 관광진흥개발기
금 20억원, 지방비 10억원등 30억원이 지원될 예정이다.
이 고장 출신 명현의 얼과 정신을 기려 포천시의 정체성을 살려나가기 위해 노력하고 면암최익현선생추모사업회의 노력이 큰 성과를 거두기를 기대하며 면암 최익현선생 소개와 김창종 본지 자문위원회 고문의 특별기고를 게재한다.
면암 최익현
면암 최익현(崔益鉉) 선생은 포천시 신북면 가채리에서 1833년(순조33년)에 태어나 1906년 서거했다.
본관은 경주 최, 자호는 찬겸(贊謙), 면암(勉庵)이다.
철종 6년(1855) 유학(幼學)으로 성균관(成均館)의 봄 도기과(到記科)에 강(講)이 뛰어나 직부전시(直赴殿試)의 은전을 입었고 그 해 정시 별시 문과(庭試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했다.
고종 5년(1868) 장령(掌令)으로서 그의 스승 이항로(李恒老)와 더불어 흥선대원군의 경복궁(景福宮) 토목공사 강행에 따른 국민부담 가중과 당백전(當百錢)의 폐단을 신랄히 비난하여 그의 미움을 샀다.
비록 보수적이기는 하나 유림(儒林)의 거두로서 불의(不義)와 타협할 줄 모르고 직간(直諫)을 서슴지 않았다.
그 뒤 공조 참판(工曹參判) ·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승진하면서 흥선대원군과 대결 양상을 보였던 민비(閔妃)세력과 짝하여 대원군은 물론 정부요로(政府要路)의 실정(失政)을 강경한 논조로 탄핵하여 조정과 성균관 유생마저도 그의 상소를 배척했으나 굽히지 않아 결국 대원군의 10년 세도에 종지부를 찍고 고종(高宗)의 친정을 실현하게 했다.
그러나 대원군(大院君)의 정치간여(政治干與)를 금하는데는 성공했으나 형식적으로는 군부(君父)를 논박했다고 하여 제주도(濟州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고종 12년(1875)에 풀려났으나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으로 대일(對日) 통상(通商)이 논의되자 다시 배일척사(排日斥邪)의 선봉에 서서 “오란망(五亂亡)”의 척사소(斥邪疏)를 올려 수호(修好)에 반대하였다가 다시 흑산도(黑山島)로 위리안치되었다.
1879년 석방되었으나 과거 짝했던 민비정권(閔妃政權)에 대하여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문인(門人)을 중심으로 개화 정책(開化政策)에 대한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선봉에 섰다.
고종 31년(1894) 갑오개혁(甲午改革)으로 근대개혁이 이루어지고 이듬해 을미(乙未)에는 단발령(斷髮令)을 내려 당시 내부 대신(內部大臣)이었던 유길준(兪吉濬)이 유림(儒林)의 거두인 그를 잡아다가 체발(剃傍8을 강요했으나 “오두(吾頭)는 가단(可斷)이나 차발(此傍8은 불가단(不可斷)”이라고 하며 끝내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광무 2년(1898)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이어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 · 의정부 찬정(贊政) · 경기도 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그는 국내에서 대소사건이 있을 때마다 죽음을 무릅쓰고 상소하여 특히 배일(排日)과 매국역신(賣國逆臣)의 토멸을 강력히 상소 · 직간하여 여러 차례 체포 · 구금되었으나 그 뜻을 굽히지 않았다.
광무 9년(1905) 을사조약(乙巳條約)이 늑결(勒結)되자 이에 대한 거부(拒否) 항쟁을 적극 벌였다.
그러나 결국 을사조약(乙巳條約)은 사실화되었고 이에 대한 반발로 전국적인 의병봉기가 일어났다.
유림(儒林)의 대표인물(代表人物)이자 배일(排日)의 거두(巨頭)인 그도 이듬해 제자인 임병찬(林秉瓚) 등 80여 명과 전라도(全羅道) 태인(泰仁)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일본의 배신(背信) 16조(條)를 따지는 의거소략(義擧疏略)을 배포하고 4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순창(淳昌)에서 거의(擧義)하여 관군(官軍) · 일군(日軍)과 싸웠으나 패하고 체포되어 대마도(對馬島)로 끌려 갔다.
그곳에서도 모든 음식물을 적이 주는 것이라 하여 끝내 거부하고 제자에게 유소(遺疏)를 구술(口述)해 남기고 아사순국(餓死殉國)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이 추서(追敍)되었다.
저서로는 《면암집(勉庵集)》이 있다.
 면암 최익현선생 숭모사업회 회장 이 구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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