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면암 최익현 선생 동상
2006년은 우리고장 포천이 낳은 순국선렬이신 면암 최익현 선생 순국 백주년이 되는 해다.
1833년(순조33년) 포천현 내북면 가신리(신북면 가채리)에서 출생하시었으며 1906년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대마도에서 단식 끝에 순국하셨다.
올해가 순국하신지 꼭 백년이 되는 해이다.
당시 일본의 한반도 침략의 괴수이자 원흉인 이토오히로부미는 다음과 같이 면암의 죽음을 애도하며 감격해 마지 않았던 것이다.
“조선 땅에 면암 최익현과 같은 선비가 또 한 명만 더 있었어도 우리는 조선 반도를 차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토오히로부미가 비록 적국 일본의 괴수였을망정 한반도의 참선비를 알아 보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고들 하였다.
어릴 때부터 골격이 비범하고 안광(眼光)이 빛나 부모의 사랑을 받았으며 기남(奇男)이란 별명을 들으며 자랐고 장차 나라를 위해 큰 일을 할 인물이라고들 하였다.
4세시 충북 단양으로 이사를 하였는데 가세(家勢)가 기운 탓이었다.
6세시 공부를 시작하였으며 스승인 화서 이항로(華西 李恒老)가 역설한 ‘애군여부(愛君如父) 애국여가(愛國如家)’와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춘추대의(春秋大義)’를 바탕으로 위청척사사상(衛正斥邪思想)“을 이루었다.
1846년(헌종 12년) 화서의 문하로 들어가 스승의 잡저(雜著)인 설문습록(雪門拾錄)을 필사하는 등 수제자로 스승 화서의 사랑과 촉망을 받으면서 격몽요결(擊蒙要訣), 대학장구(大學章句), 논어집주(論語集註) 등을 수학하여 성리학의 기초를 습득하였으며 스승의 아드님인 이준, 이복과 임규직, 김평묵, 박경수, 유중교 등 동문의 선비들과 수학에 열중, 동문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화서 선생의 문하를 떠날 때 스승으로부터 받은 면암(勉菴) 두 글자는 이후, 아호로 통용되었다.
22세시, 다시 포천으로 이사하였다.
이듬해인 1855년(철종 6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과 급제하였다.
이해 6월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로 임명되어 성균관 전적을 거쳐 1859년(철종10년)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 사간원 정언(司諫院 正言)을 거치면서 서울로 이사를 하였다.
이해 이조정랑으로 있다가 철종13년 신창현감으로 나갔고 고종2년 성균관 직강으로 재직중 모친상을 당해 퇴임 고종5년 사헌부 장령으로 임명되어 경복궁 토목공사로 인한 국민부담의 가중과 당백전(當百錢)의 발행에 따르는 재정의 파탄을 들어 흥선대원군의 실정(失政)을 상소하는 등 당시로서는 감히 상상도 못할 어마어마한 큰 일을 하셨다.
이로 인하여 대원군의 노여움을 사서 돈녕부도정(敦寧府都政)으로 전직되었다가 상소하고 사직하였다.
광릉 봉선사에서 독서하던중 고종 7년 승정원 동부승지로 임명되었으나 얼마 뒤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종8면 신미양요가 일어나자 양근 대곡으로 동문수학한 선비 김평묵을 찾아가 혼란한 시국과 앞으로의 대처방안을 상의한 뒤 고종10년(1873년)에 올린 상소가 큰 파문을 일으켜 10년 집정의 당시 왕보다 높은 하늘 같은 권좌의 흥선대원군을 하야시키고 고종임금의 친정을 하게되는 계기를 마련하는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이해 동인열전(東人列傳)을 편찬했고 고종의 특별한 신임과 총애를 받아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를 거쳐 호조참판에 특배(特拜)되었다.
그러나, 실권(實權)이 민비(閔妃)일족에 의해 농단되자 관직을 사퇴하는 한편 공조참판으로 시폐(時弊)의 시정을 재차 상소하였다.
그러나, 고종10년에 올린 상소에서 대원군인 군부를 논박했다는 죄로 제주도로 유배되었으나 1875년 풀려났다.
당시, 제주도 유배시 그 유명한 한라산을 등산하고 등산기를 쓰기도 하였다.
선비이자 포천인으로는 최초의 한라산 등반객이었다는 점에서 특별히 기록될만하다.
고종13년 병자수호조약을 결사 반대하는 도끼상소-지부상소(持斧上疏) 즉 5조로된 격렬한 척상소(斥上疏)를 올린 끝에 흑산도에 위리안치(圍離安置)되었다.
고종16년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에 돌아온 뒤, 이듬해 호군(護軍)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설악산에 들어가 몇 달을 지냈으며 고종 24년 부친상을 당하였다.
고종27년 탈상 후, 화서선생문집 전질을 영조(永祚)와 함께 선사(繕寫)하는 등 20년 동안 학문에만 힘썼다.
고종 31년 제2차 김홍집내각이 성립되고 갑오경장(甲午更張)으로 단발령이 내려지자 이를 반대하다가 투옥되기도 하였다.
1898년(광무 2년:대한제국) 의정부 찬정(贊政)에 임명되었으나 소를 올려 사임하고 12조의 시무책(時務策)을 건의하여 국정을 바로 잡을 것을 건의 역설하였다.
이에 궁내부특진관, 중추원의관, 경기도 관찰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배일(排日)과 매국역신(賣國逆臣) 토멸을 강력히 주장하여 여러차례 구금(拘禁)을 당하였고 1900년 봄 호서지방(충남) 정산(定山)으로 이사했고 이후 몇 년간 경주를 비롯하여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유람하면서 비문도 짓고 족보를 보살피기도 하였다.
1905년(광무9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왜놈들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일본의 보호국이 되자 반대상소를 올리는 한편 의병봉기를 강력결의, 1906년4월 제자 임병찬, 임낙, 등 80여명과 함께 전북 태인에서 회맹(會盟) 결의하고 의병을 모집하는 한편, 일본의 배신 16조를 규탄하는 의거소략(義擧疏略)을 배포하였다.
이에 전국에서 의거에 호응하여 항일의병이 봉기하였고 면암선생 자신도 순창에서 약 40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과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패전하고 제자 임병찬과 함께 일본군에 체포되어 이해 7월 대마도의 경비대 감옥에 유폐되고 말았다.
죽음을 각오하고 옥중단식을 단행하고 국왕에게 보내는 유소(遺疏)를 제자 임병찬에게 구술기록케 하였다.
73세의 쇠약해진 고령의 몸에도 불구하고 단식을 계속하던 끝에 끝내 옥사하였다.
학문적으로 주자학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 스승 화서(華西)의 학통을 계승했으나 이기론(理氣論)과 같은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이론보다는 실천적인 위정척사(衛正斥邪)운동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요즈음 말로 대신하자면 이론만 앞세우는 이론 위주의 학문보다는 실천위주의 행동하는 지성인이며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선비정신의 꽃이었다.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춘추대의(春秋大義)를 바탕으로 한 행동하는 역사의 주역이었으며 노블레스 오불리쥬의 서양의 귀족정신과도 상통하는 점이 있어 연구의 가치가 있는 큰 인물이었다.
또 이주기객설(理主氣客說) 이수기졸설(理帥氣卒說)을 주장하고 심설(心說)에 있어서는 화서(華西)의 입장에서 유중교의 심설을 비판하는데 그쳤다.
왜놈의 사슬에서 벗어나고 해방이 되고 독립된 우리 조국은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을 수여하였다.
저서로는 「면암집」이 있다.
2006년 면암 순국 100주기를 맞아 청양군(모덕사관리사무소, 충남 청양군 목면 송암리 171)에서는 그동안 보관중이던 「면암집」영인본(影印本)을 발간하였으며 「간찰선(簡札選)」도 함께 펴냈으며 화서학회와 면암학회 공동편집으로 도서출판 문진이 인쇄를 맡아 2006년3월에 발행되었다.
특히 「간찰선」에는 모덕사 소장 면암의 존영과 모덕사 일대 건물, 유품, 서책, 친필서신, 화서의 하사 필묵 등이 영인되어 있어 보는이로 하여금 가슴에 떨리는 감동을 가눌길이 없게 한다.
포천의 면암 최익현선생숭모사업회(회장 이구상)에서는 그동안 대마도 소재 면암 유폐지를 방문참배하였으며 만화로 된「면암 최익현」을 발행하여 어린이들에게 만고충신 면암 최익현선생의 생애와 사상을 학습, 고취시키는데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고 한다.
또 면암 최익현선생 숭모 한시 백일장을 개최하는 등 다채로운 행사를 개최했으며 생가터에는 면암 최익현선생 기념관이 건립될 예정이라고 면암최익현선생숭모사업회(회장 이구상)장은 피력하고 있다.
내고향 포천 출신 면암 최익현선생의 만고충절(萬古忠節)과 춘추대의(春秋大義)를 더욱 빛낼 수 있는 기념사업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 바램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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