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조국광복과 민족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박열 선생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1902년 경북 문경에서 태어나 어려서 서당교육과 신식교육을 받고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동참하여 만세시위운동을 벌였다.
나아가 귀향하여 친구들과 함께 태극기와 격문을 만들어 살포하며 문경의 3․1운동을 촉발하여 민족독립의 의지와 열기를 분출하였다.
이후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기는 일본 본토보다 어렵다고 판단하여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학업을 계속하며 보다 과학적이며 선진적인 반제이론을 수용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도쿄에 도착한 뒤 정칙영어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며 저명한 사회주의자들과 무정부주의자들을 직접 찾아가 교류한 것도 이런 이유가 있었다.
더 나아가 효과적인 항일투쟁을 위해 고학생들을 규합하여 의혈단을 조직하고, 조선고학생동우회에 참여하여 간부로 활동하였다.
1922년 초 평생동지이자 아내인 가네코 후미코와 운명적으로 만나 반제 항일투쟁의 길을 같이 가게 되었다.
무정부주의단체인 흑도회에 참여하고, 그 기관지인 『흑도』의 발간 책임을 맡아 선전활동에 주력하며 항일운동을 편 것이다.
특히 식민체제 타도를 목표로 하는 의열투쟁노선을 천명하면서 1922년 말 직접행동 조직인 흑우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민중운동』․『후데이센징』․『현사회』등의 잡지를 통하여 항일의식을 고취하였고, 서울․도쿄의 여러 사회운동단체와 연대활동을 펴면서 민중의 권익신장에도 힘썼다.
다른 한편으로 1923년에는 흑우회와는 별도로 불령사를 조직하여 본격적인 의열투쟁을 추진하여 갔다.
그해 가을 일본 황태자의 결혼식을 계기로 의열투쟁을 전개하기로 계획하며 폭탄 반입 및 제조 방안을 강구한 것이다.
그러던 중, 1923년 9월 관동대진재의 발생을 기화로 일제는 한국인들과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을 자행하였다.
이때 선생과 가네코 후미코를 비롯한 불령사 회원들도 피체되어 폭탄 반입계획이 드러나게 되고, 결국 일왕 암살을 꾀한 "대역사건"으로 비화되었다.
1923년부터 1925년에 걸친 총 20여 회의 조사과정에서 선생은 일왕을 폭살하기 위해 폭탄을 구입하려 했다고 당당히 밝혔다.
나아가 사형 판결이 나자 선생은 "재판장, 수고했네. 내 육체야 자네들 맘대로 죽이지만, 내 정신이야 어찌하겠는가"라고 일갈하였다.
불굴의 독립의지와 민족정신을 표출한 것이다.
이후 무기로 감형되었지만 일제 패망 이후에도 대역사범이라는 이유로 석방되지 못하다가 1945년 10월 27일에야 풀려났다.
실로 22년 2개월이라는 기나긴 옥고를 치른 것이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독립기념관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는 선생의 뜻과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하여 관련자료와 사진을 8월 한 달간 전시하는 한편, 순국선열유족회에서도 이 달의 독립운동가 학술강연회를 개최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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