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6일에 경의선(서울-신의주 간 철도노선) 개성 북방 "여현" 역에서 남측(대한민국)에서 구금하고 있던 고정간첩 김삼룡, 이주하와 북측(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 구금되었던 건국준비위원회 평안남도 위원장이자 민주당 당수였던 기독교인 조만식 장로님을 맞 교화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내 고향 영평천에서는 북측에서 보내오는 북어와 남측에서 보내는 의료 약품 등과 물물교환 무역을 활발히 진행하던 시기였다.
1950년 6월 24일 영평천 냇가에는 남측으로 보내올 북어더미가 산처럼 쌓였는데 나중에 6.25전쟁이 터지자 그 북어더미 속에서 웅장한 T50 소련제 땅크(러시아어)가 굉음을 내며 남침을 하였다.
6.25 첫날, 4시~10시 사이에 38선은 깨지고 10시 정각 북의 땅크 351호가 포천 경찰서 앞에 우뚝 섰다.
포천 신읍으로 들어오던 땅크가 쏜 포탄 3발이 새장터 허씨댁을 비롯한 세채의 민가에 명중되여 모두 불길에 쌓였는데 지하실ᄃ에 숨었던 허씨댁 큰아들이 숨졌다.
포천 최초의 6.25 민간인 희생자였다.
6.25 발발 10일전, 호병골에 살던 모씨가 북으로 월북하였다가 6.25가 터지자 남하하여 포천군 인민위원장이 되었으며 신북면 상심곡리 국사봉 기슭에 빨치산 거점을 확보 아지트로 삼으려다가 경찰에 발각된 일이 1948년 발생하였었는데 그 아지트의 책임자였던 허모씨가 신북면 인민위원장이 되고 포천면사무소 앞에서 약국을 하던 이모씨 아들이 포천면 인민위원회 사무장(비서장)이 되었다.
포천 최초의 치과대학 출신 의사 손모씨도 인민군이 되어 입대하였으며 군내면 윤모씨도 인민군 장교가 되었으니 세상은 뒤집혔다고들 하였다.
특히 놀라운 일은 도 평의원을 역임했단 요골 구한만 외척 군수 집안의 김모 교사가 인공기 아래 덕수상고 교책이 되고 따님이 학교 중학생 위원장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6.25 북한 괴뢰정권인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남조선 정권은 지주 자본가들이나 공무원 경찰관 가족 그리고 심지어는 마을 이장댁 까지도 재산 몰수, 인민재판을 통한 집단 학살을 일삼았다.
북한 화폐는 유통이 아니되여 물물교환을 하였는데 양복 한 벌에 쌀 한 말, 구두 한 켤레에 보리 한되. 이런 식이었으며 남조선 노동당원들에게는 배급쌀을 주었다.
9월 15일 역사적인 맥아더 UN군사령관의 인천상륙작전 소식이 지하실 비밀 라디오 전파를 탙고 알려지자 북한에서 내려온 내무서원, 정치보위부 요원들이 마을마다 다니며 양민들을 잡아다가 손을 철사줄에 무끈채 학살하였는데 만세교, 공섬다리, 물어고개에만도 수 백명이나 되었다.
내 고향의 6.25는 죄없는 양민학살로 막을 내렸다.
지금도 학살의 현장에는 유골이 남아있어 그 처참한 6.25의 동족상잔의 비극을 되새기게 하고 있다.
필자연락처 02-932-243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