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굉필은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일찍이 함양에 사는 정여창과 친하게 지냈는데 서로 만나면 함께 토론하면서 밤을 세웠다.
정여창이 안음현감(安陰縣監)으로 나갔을 대의 일이다.
어느 날 김굉필이 그를 찾아 갔는데, 그때 정여창은 관청에서 사용하기 위해 금으로 술잔을 만들어 두었다.
김굉필이 금 술잔을 보고는 친구를 책망하며 말했다.
"자네가 이런 쓸데없는 짓을 할 줄은 몰랐네"
그 후에 현감으로 온 사람이 과연 그 문신 때문에 독직 혐의를 쓰고 물러났다.
김굉필의 스승 김종직은 이조참판이 되었음에도 조정에 건의하는 일이 별로 없었다.
그러자 김굉필은 당돌하게도 스승에게 금을 올려 이를 힐책하였다.
"도(道)란 겨울에 털옷을 입고 여름에는 얼음물을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날이 개면 외출하고 장마가 지면 걸음을 멈추는 것입니다. 하지만 누가 이것을 오전히 실행할 수 있겠습니까? 고고한 난초도 세속을 따르다 보면 마침내 변하고 말 것이니. 소는 밭을 갈고 말은 사람을 태운다는 것조차 누가 믿어 주겠습니까?"
이글을 읽은 스승이 김굉필에게 담장을 보냈다.
"벼슬이 분수에 넘쳐 높은 지위에 이르렀기를 임금을 바르게 하고 세상을 구제하는 일이야 나 같은 사람이 어찌 해낼 수 있으랴, 후배들이 못났다고 조롱하는 것이 어쩔 수 없으나 세속의 이익 또한 좆지 않을 것이다."
이 글로 인해 결국 두 사람은 갈라섰다.
김굉필은 남효온(南孝溫), 이총(李摠), 이정은(李貞恩), 허반(許磐), 신영희(莘永禧)등과 가까이 지냈다.
연산군이 즉위하자 김굉필은 언젠가 자신들에게 화가 미칠 것을 짐작하고 신영희에게 말했다.
"자네과 교문을 끊으려 해도 차마 끊지 못하고 있었네, 아마 10년이 못가 우리에게 화가 미칠 것이네, 나 같은 사람이야 결국 화를 면할 수 없겠지만 자네는 멀리 피하는 것이 좋을 것이네"
이후로 그는 친구들을 만나지 않았다.
그러나 남효온이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은 그는 하는 수 없이 문병을 갔다.
그런데 남효온은 그의 얼굴을 보려 하지 않았다.
남효온은 벽을 보고 누워 끝내 한마디도 않았다.
남효온 역시 스스로의 미래를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굉필은 1494년 벼슬길에 나아가 형조좌량에 이르렀으나 자신의 예언대로 무오사화가 나자 김필재의 군하라는 이유로 귀양을 떠났다.
그는 유배지에서도 후학을 모아 가르쳤는데, 구 문하생이 점점 늘어났다.
그 때문에 여기저기서 비방의 소리가 들려오자 정여창이 말했다.
"시국이 어수선한 때에 선비들을 모아 가르치면 남의 모함을 반기십상이네. 어서 가르침을 중지하게"
그러자 김굉필은 이렇게 답하였다.
"먼저 안 사람이 뒤에 안 사람을 깨우치며, 먼저 깨달은 사람이 뒤에 깨달은 사람을 깨우치는 법일세, 나는 아는 것을 말할 뿐이요, 화와 복을 당하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으니 내가 알 바 아니네"
그는 늘 자녀들에게 이렇게 훈계하였다.
"남의 바쁜 점을 말하는 것은 피를 입에 물고 남에게 뿜는 것과 같다. 피를 물고 남에게 뿜으면 내 입이 먼저 더러워지는 것이니 너희는 이 말을 명심하라"
결국 그는 1504년10월 초하루, 유배지인 순천 땅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때 그의 나이 51세였다.
죽음을 당하는 날, 그는 깨끗이 목욕한 후 관대(冠帶)를 갖추고 마당으로 나갔다.
죽음을 앞두고 있는데도 그의 안색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마당으로 걸어 나가다가 신발이 벗겨지자 그는 천천히 신발을 신었다.
그리고는 수염을 쓰다듬은 후 한 웅큼 입에 물면서 말하였다.
"몸과 털과 살은 부모에게 받았으니 이것까지 해를 입혀서는 안되오, 내 수염을 다치지 않게 하시오"
그리고는 조용히 형을 받았다.
그의 제자들은 모두 이름을 떨쳤는데 조광조, 이장곤, 김정국 같은 사람이 그들이다.
김굉필(金宏弼)
1454(단종2) ― 1504년(연산군10)
본관은 서흥(瑞興)이며 자는 대유(大猷), 호는 사옹(蓑翁) 또는 한훤당(寒暄堂)이다. 어려서부터 호방하고 거리낌이 없었다.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1480년(성종11) 생원시에 합격한 후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1494년 경상도 관찰사 이극균(李克均)에 의해 천거되어 남부참봉에 제수되면서 관직생활을 시작해 1494년 형조좌랑이 되었다.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문하였다는 죄목으로 평안도 회천에 유배되었다가 2년 뒤 수천으로 옮겼다.
그는 유배지에서도 학문 연구와 후빈 교육에 힘써 회천에서는 조광조에게 학문을 전수하였다.
그러나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극형에 처해졌다.
저서로는 경현록, 한훤당집 등이 있으며, 시호는 문경이다.
문묘(文廟)에 배향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