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천시 신북면 고일2리 산 30에 위치한 독곡 성석린 선생의 묘
지정번호: 향토유적 제22호
소 재 지: 포천시 신북면 고일2리 산 30
규 모: 높이 1.5m 지름 3m
독곡선생은 고려 충숙왕 7년(1388) 개성 독곡에서 출생했다.
그래서 호를 독곡이라 했다.
4세 때인 충혜왕 2년(1341)에 음사(蔭仕)로 사온승동정계통사랑(司?承同政階通仕郞-고려때 관직)이 되었고, 공민왕 4년(1355)에 사마시(司馬試)에 제삼인(第三人)으로 합격했다.
공민왕 7년(1358)에 정당문학(政堂文學)에 뽑히니 이때 장시관(掌試官)은 이인복(李仁復)이다.
이때부터 벼슬길에 오르기 시작해서 가을에는 국자직학(國子直學)을 배수했고, 그 후 한림원(翰林院)에 검열(檢閱)을 맡았다가 다시 삼사(三司)에 도사직(都事職)을 역임하게 되었다.
공민왕 12년(1363) 여름에는 전의주부(典儀注簿)로 일하다가 승봉랑(承奉郞)으로 승진했다.
14년에 군기감(軍器監)으로 있었고 다시 조봉랑(朝奉郞)으로 옮겼다가 가을에 전교(典校), 부령(副令), 보문각 직제학(寶文閣 直提學)을 역임했고 봉선계(奉善階)에 올랐다.
이때 우왕(禑王)이 말하기를 사한(詞翰)이 귀신같다고 성석린을 조용히 칭찬해 주더니 뒤에 지인상서(知印尙書)로 임명하였다.
겨울에 봉상대부(奉尙大夫)로 승배(陞拜)되고 이때부터 2년간을 禮儀, 군부(軍簿)전리 제덕랑지제교보문각등을 두루 역임했다.
고려 공민왕 17년(1368) 겨울에 해주목사(海州牧使)로 나갔다가 돌아와서 중현대부(中顯大夫)로 진급하니 이때에 신돈(莘旽)이 성석린을 미워해서 모함했기 때문에 우왕이 신돈의 말만 듣고 성석린을 귀양 보냈다가 다음해 봄에 소환했다.
1369년에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이 되고 다시 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으로 전출됐다.
다시 위형윤(尉衡尹)에서 진현관직제학지제교겸춘추관 편수관(進賢館直提學知製敎兼春秋館 編修官), 겨울에 전의(典儀)가 되었으나 기타 관직은 종전과 같았다.
공민왕이 이해에 승하하고 고려우왕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는데 이때에 정순대부(正順大夫)로 좌부대언직(左副代言職)에 있었다.
얼마 후에 봉순대부(奉順大夫)로 진계(進階)되고 종전대로 좌부대언(左副代言)과 보문계직제학(寶文階直製學)은 그대로 역임하고 다시 오순계(五順階)에 승진되면서 진현관직제학(進賢館直提學)에 동지서연사(同知書延事)까지 겸임하게 되었다.
교려 우왕 원년(1395) 여름에 좌대언(左代言), 예문관직제학(藝文?直提學)에서 지군부사제교서연계(知軍簿司製敎書延階)에 이르렀다.
가을에 지신사겸판전의(知申事兼判典儀)가 되었고, 예문관직제교서연(藝文館直提敎書延)만을 종전대로 재임하였다.
겨울에 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과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을 역임했다.
다음에 밀직제학(密直提學)과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으로 승배되고 다시 상호군(上護軍)으로 있으면서 봉익대부계(奉翊大夫階)에 올랐다.
고려 우왕 4년(1378) 유성좌명공신(揄誠佐命功臣)으로 불리우게 되었으니 이는 직제(職制)가 개정(改正)되어 밀직사(密直司) 이상이면 누구나 붙여지는 당연직(當然職)이었다.
이 해 여름에 왜적이 침입해서 송도(松都) 근경까지 이르렀고, 드디어 경도(京都)에 입성하게 되었다.
이 때 양백연(楊伯淵)은 원사(元師), 성석린은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있었는데 모든 장수들이 대동강을 건너 안금지대(安金地帶)에서 결전하고자 하는데 유독 성성린만은 대동강을 배수진으로 싸우자고 해서 이를 쫓았다.
결국 왜적이 대패하고 퇴각했다.
가을에 함안으로 폄(貶)했다가 우왕 5년(1379)에 돌아와서 동지밀직사(同知密直使)가 되고 다시 현관(賢館)의 제학(提學)으로 진출했었다.
우왕 8년에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으로 승진되었고, 우왕 13년(1387)에 판덕창부사(判德昌府事), 다음해에 정당문학(政堂文學), 여름에 양광도관찰사(楊廣道觀察使)로 나갔다가 가을에 소환되어 문하평리겸판소부사(門下評理兼判小俯事),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 지춘추관사대호군(知春秋館事大護軍), 겨울에 판도평의겸사헌부대사헌(判都評議兼司憲府大司憲)으로 있었다.
조선 태조 원년(1392)에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고 이때 성석린은 진현관대제학겸성균관대사성(進賢館大提學兼成均館大司成)으로 폐배되었다.
태조 3년에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태조 4년에 판영부사(判渶府事), 다음 해에 예문관, 춘추관 태학사로 전배(轉拜)되었다.
정종 2년(1400)에 좌정승판리조사(左政承判吏曹事)가 되었고, 여름에 좌정승판의정부사(左政承判議政府事)로 승배되었다.
세종 5년(1423)정월 12월에 별세하니 정년이 86세이다.
포천시 신북면 계류리에 안치하였다.
행선은 평안군 도체찰사 김연기(金連枝)가 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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