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신으로 군내면 용정리에서 출생, 성장(1628년:인조6년∼1701년:숙종27년)하였는데 자는 여집, 본관은 파평, 증 판서 세징(世徵)의 아들이며 진주목사 윤기경의 아버지이다.
현종 4년 식년 문과에 급제하고 청환직(淸宦職 : 임금을 가까이서 모시는 관직)을 거쳐, 숙종 2년 의주부윤, 숙종6년 승정원 승지, 숙종 7년 충청감사, 숙종 8년 진하사겸사은부사(進賀使兼謝恩府使)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숙종 12년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으며 이조참판을 거쳐 한성판윤(漢城判尹)으로 승배하였다. ‘일일지정(一日之政)’에 오인(五人)이 초배(超拜)란 새로운 술어가 나왔는데 ‘이현일’, ‘유하익’, ‘유병현’, ‘강선’, ‘윤이제’ 등이 임금님의 신임이 두터워 하루 아침에 자고 나니 벼슬길에 뛰어 올랐다는 말이기도 하다.
같은 달에 형조판서에 올랐다.
숙종19년 8월에는 어영대장(御營大將 : 지금의 청와대 경호실장으로 판서급)을 겸임케 하자는 왕의 뜻이 전해지자 조신(朝臣)들이 너무 임무가 중하다는 이론이 있어 중지하였다.
숙종17년 4월 원접사(遠接使 : 중국사신인 치사를 영접하는 외교관)가 되어 청의 칙사를 맞았으며 1692년 어영대장, 비변사제조(備邊司提調) 등 수많은 문무백관, 당상당하관 등을 겸직하였으며 우참찬에 승임되었다.
갑술환국(甲戌換局;숙종20년 남인정국이 소론으로 넘어간 일)으로 사직되었다가 숙종 24년(1698년) 다시 서용되었으나 숙종27년 6월(1701년) 별세하니 74세였다. 조선조 역사상 이토록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동분서주하며 승승장 관직을 화려하게 역임한 선비도 드물 것이다.
임금의 측근에서 지방 관찰사로 다시 승지로 외교관으로 무관의 최고의 영광의 자리인 어영대장에 이르기까지 안 거친 관직이 없을 만치 화려하다. 외교의 관문이자 무역의 중시이었던 의주부윤, 수도 서울의 특별시장 격인 한성판윤, 대통령 특명전권대사겸 축하사절단장 격인 사은사(謝恩使)나 진하사(進賀使)를 지냈다는 사실도 님이 얼마나 임금의 신임이 두터웠나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임금님의 신임을 두터이 받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식년문과라는 과거에 급제하였다는 뛰어난 분이라는 사실도 있겠지만 사실은 청백(淸白)의 관직생활을 하였다는 점이 크게 작용하였다는 것이다.
글 머리에도 작용하였다는 것이다.
글 머리에도 말했듯이 윤이제 대감께서는 평생을 울타리 없는 집에서 살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미관말직에서 퇴직하였으면서도 고대광실, 호화주택, 높은 집을 짓고 부귀와 영화를 누린다는 요즈음 세태를 보면 그에게 윤이제 대감의 행적을 살필 기회를 가지라고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