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진의 연재수필]아빠 어렸을 적에(11)
호야 심부름
포천신문 기자 / jun28258@gmail.com 입력 : 2004년 11월 20일
“야, 우리 저녁에 위병소에서 깡통차기하고 놀래?
여름의 저녁이면 우리는 누가 모이란 말을 하지 않아도 군부대 위병소 앞으로 모입니다.
전깃불이 들어오지 않는 우리 동네 아이들은 늘 군부대 위병소 앞에서 흘러나오는 전기 불빛이 좋아합니다.
훈련이나 비상시를 제외하고는 어두워지면 늘 위병소 앞은 전등이 켜져 있으니까요.
커다란 꿀밤나무(플라타너스) 그늘이 시원하기도 하여 좋았지만 달이 없는 밤이면 줄곧 위병소 가의 명석이네 집 근처에서 위병소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을 달빛 삼아 도둑놈 잡기며 술래잡기, 그리고 깡통차기를 하고 놉니다.
재미있게 놀다가도 순찰 도는 주번사관이라도 볼라치면 무슨 전쟁터의 적군이라도 만난 것처럼 잘도 숨지요.
길환이네 집은 호야집입니다. 집안엔 호야를 잔뜩 쌓아놓고 살지요.
길환이 아버지께서는 자전거에 유리로 만든 호야(등잔의 불을 꺼지지 않도록 끼는 유리)와 어항을 짚으로 깨지지 않도록 잘 엮어, 한 자전거 가득 싣고서 동네 동네를 다니며 구멍가게에 납품을 하십니다.
“냇가에 가서 호야 좀 닦아 오너라. 깨뜨리지 말고 조심해서…”
호야를 닦는 일은 언제나 맏이인 내 차례입니다.
깨지기가 쉬워서 엄마나 아버지는 좀처럼 동생들을 시키지 않는답니다.
얼음을 깨고 검게 그을린 호야 지푸라기를 넣어 막대기로 돌리며 시린 손끝으로 닦는 것은 정말 하기 싫은 심부름입니다.
그러나 호야는 뜨거운 불에 녹은 유리를 입으로 얇게 불어 만드는 것이라 잘도 깨집니다.
날이라도 되우 추운 날이면 호야는 더욱 잘 깨집니다.
그러면 한바탕 꾸중을 듣고 길환이네 집으로 달려가 호야를 사와야 합니다.
어디 돈이나 주시나요? 달걀을 들고 가서 바꾸어 오는 것이지요.
씨암탉 한 마리가 알을 낳으니 우리는 그 맛난 달걀을 먹고 싶어도 먹을 수가 없었지요.
계란으로 두부도 사고 호야도 사고 그래야 하니까요.
길환이네 집에서는 호야뿐만 아니라 부뚜막에 작대기사탕 틀을 설치해 놓고 작대기사탕을 만들어 팝니다.
작대기 사탕은 정말 맛있습니다.
게다가 친구들에게 사탕 먹는 것을 자랑하기엔 최고지요.
“나, 한번만 빨아먹자!”
친구 앞에서 그 노랗고 반질반질한 막대기 사탕을 입에서 쪽 빨아 꺼내며 자랑하면 누구도 한입만 빨자고 안할 수 없지요.
작대기사탕을 돈으로만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작대기사탕은 총알 탄피 두 개나 계란 한 개, 그리고 사이다 병 두 개 정도면 살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들에게 병이나 총알을 줍는 것은 정말 큰 보물을 줍는 것보다 기쁜 일입니다.
호야불은 기름불이나 등잔불보다 환하고 편합니다.
기름불은 참기름이나 들기름을 사기 종지에 담아 목화를 무릎에 비벼 심지를 만들어 불을 켭니다.
등잔불은 석유를 넣고 목화솜을 비빈 심지나 무명실을 여러 갈래로 모아서 만듭니다.
기름불이나 등잔불을 켜려면 참기름이나 들기름, 피마자기름을 쓰는 집도 있었지만, 호야불은 대부분 군부대에서 석유를 몰래 조금씩 빼다 호야불을 켭니다.
호야불은 호롱불이라고도 하는데 바람에도 꺼지지 않고 들고 다닐 수 있는 손잡이가 있어 밤에 뒷간 가기에 편리합니다.
"참, 편한 세상이야! 아무 때나 불을 들고 다닐 수 있으니 말이야."
어른들은 세상 참 좋아졌다며 말씀하시네요. 어린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 달 전부터 옆구리에 공구 주머니를 차고, 속에 구리철사가 들어있는 줄 타래를 메고, 이집 저집 옮겨 다니며 공사를 하는 아저씨들이 있었습니다.
그 아저씨들은 집집마다 줄을 두 줄씩 팽팽하게 당겨 메고 전봇대라는 크나큰 말뚝을 박아 그 위에 줄과 줄로 연결하더니 오늘 저녁, 마을 회관 앞마당에서 떡도 나누어 주고 돼지도 잡아 점등식이 있답니다.
"점등식이 뭘까?"
나는 속으로 무척이나 궁금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어른들은 개울에 풀을 깎고, 마당에 풀을 뽑고, 마당을 쓸며 야단법석입니다.
우리 집 안방에 다섯 장이나 붙어있는 오치성 달력의 주인공 오치성이도 오고, 군수도 오고, 면장도 오고, 군부대 여단장도 온다고 하네요.
우리 마을이 생긴 이후로 최고의 경사랍니다. 도대체 전깃불이 얼마나 환하길래 그 야단법석일까….
대단하긴 대단한가 봐요. (계속) |
포천신문 기자 / jun28258@gmail.com 입력 : 2004년 11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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