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 선생은 신라 47왕 헌안왕(憲安王)이 즉위하던 해 서기 857년 신라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경주 최씨의 시조인 선생은 어려서부터 풍의가 수려하고 성품이 고결하였으며 학문을 좋아하였다. 서기 868년(경문왕 8) 12세의 어린 나이로 청운의 꿈을 품고 당나라(중국)에 유학을 떠나게 되었을 때 아버지가 그에게 ‘10년 안에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격려하였다고 한다. 그는 유학한 지 7년만인 서기 874년 18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였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10년보다 4년 빠르게 급제한 것이다. 선생의 뛰어난 재주와 피나는 노력의 성과였다. 서기 875년 19세 되던 해 낙양(洛陽)에 유랑하면서 시작(詩作)에 몰두하여 5언시, 7언시, 잡시부(雜詩賦) 각 1권씩을 남기었다. 서기 876년 20세 때 선주표수현위(宣州漂水晛尉)에 임명되었는데 현위는 지방행정수령인 바 20세의 외국인으로서 이례적인 우대이었다. 공무에 충실하였을 뿐 아니라 여가에는 시작(詩作)에도 열중하여 중산복귀집이라는 명작 5권을 저술하였다. 879년 23세 때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키자 당나라 조정에서는 고변을 병마도통(兵馬都統·관군의 총지휘자)에 임명하고 반적을 토벌케 하였다. 고변은 평소 선생의 인격과 문재(文才)를 추앙했던 터라 종사관(從事官)으로 맞이하여 들였다. 4년 간 군막(軍幕)에서 대임을 맡아 표(表) 장(狀) 서(書) 계(啓) 격문(檄文) 등이 모두 선생의 손에서 이뤄졌다. 황소의 반란군이 장안(長安·당나라 수도)을 습격하는 등 그 세가 대단하였다. 이에 선생은 서기 880년 24세 때 황소를 토벌하는 격문(檄文)을 지었다. 이 격문은 적 황소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을 뿐 아니라 이 글 중에 ‘천하에 모든 사람이 너를 죽이려고 뜻을 모았을 뿐 아니라 땅 속에 귀신까지도 이미 너를 죽이려고 의론하였을 것이다’라고 한 구절에 이르러 포악무지했던 황소도 놀라 혼비백산하여 평상에서 굴러 떨어졌다. 이로써 선생의 문명(文名)이 천하에 떨치었다. 884년 26세 당나라 황제로부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 받았다. 자금어대란 황궁(皇宮)에 언제든지 드나들 수 있는 포상물로서 외국 청년으로는 더할 수 없는 영광이었다. 관직으로 있을 때 당나라의 고명한 학자 고운(顧雲) 나은(羅隱) 등과 교유하면서 명시(名詩) 명문(名文) 명저(名著) 등을 지어 1만여 수를 지어 남기었는데 귀국 후 정선하여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을 이루게 되었다. 이는 우리나라 유학자로서 전하는 문집 중 최초이자 최고의 것으로써 국문학 연구에 가장 귀중한 자료이다. 조선조 영조 때 중간된 것이 현재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2권4책 당서(唐書) 예문지(藝文志)에도 선생의 저서명이 수록되어 있어 그 명성이 전하고 있다. 884년 28세 당나라 희종황제(僖宗皇帝)는 선생이 고국에 돌아갈 뜻이 간절함을 간파하고 특별히 국서를 가져가는 사신 자격을 띠게 하여 주었고 고변은 200관이나 되는 돈과 행장을 갖추어 주었으며 당나라 문사들은 시를 지어 환송했다. 886년 30세 그리던 고국에 돌아오니 한림학사(翰林學士) 병부시랑(兵部侍郞) 요직에 임명되었다. 당나라에서 저술한 계원필경과 중산복귀집 및 시부(試賦) 3권을 헌강왕에게 올리었다(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