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은 일본의 강점으로부터 해방되어 나의 조국을 다시 찾은 감격의 날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날의 감격을 회상하며 조국을 굳건히 지키겠다는 결의에 찬 국민은 몇몇이나 있을까?
60년 전 8?15는 당시 일본 천황의 12시 대 연합군 항복 방송 라디오 소리로 감격의 순간은 시작되었다. 내 고향 포천의 장거리에서는 농악대의 농악 소리가 온 마을을 떠들썩하게 하였다. 읍내 간이학교(2년제 초급학교) 교장이시던 문상규 님이 포천 치안대장이 되시어 경찰서를 지키셨으며 경찰서 유도 연습장에는 미군들이 진주하여 치안을 도왔다. (현)천주 교회 밑에 있던 일본 진자(신사)는 불타서 그 불꽃이 하늘을 가렸다.
일본 소학교 아이들과 면사무소 앞에 살던 일본인들 그리고 신읍국민학교 교장 쓰다리아찌 선생과 일제 공무원들은 마차에 짐을 싣고 남쪽으로 갔으며 일본 청년 훈련소 교관이었던 다까하라 센세이는 청년들에게 몰매를 맞고 골병이 들어 죽었다고 했다.
이동백씨는 김구 선생을 지지하는 한독당을 결성하였으며 문진교 씨는 이승만 박사를 지지하는 대한독립촉성회를 조직하였으며, 일본부인회는 대한부인회로 이름을 바꾸고 홍의원 부인 이기정씨가 활동하였다. 당시는 모두 애국자였으며 모두가 독립 운동가였다. 「단결하자」는 구호가 여기저기 붙어있었던 때였다. 그만큼 분열과 혼돈의 시기였다.
영중면 양문리(현 38교)는 38선이라고 하여 소련군이 통행인을 감시하였다. 골목마다 어린이들이 두 주먹을 쥐고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대포 대포 양대포…….’라고 외치고 다녔으며 「미국을 믿지말고 소련에 속지마라 일본은 일어난다」는 속담이 떠돌았다.
최초로 문진교씨가 입법위원이 되어 미군정청에 포천 대표로 참가하였다.
포천 초급중학교(현 : 포천중학교의 전신)가 설립되어 포천군청 농회 청사에서 개교를 하였다. 포천경찰서에서는 「민주경찰 노래」가 읍내를 뒤흔들었다. 「무궁화 아름다운 삼천리 강산……」 해방가가 내 고향 포천은 물론 온 나라 안을 뒤흔들었다. 「어둡고 괴로워라 밤이 길더니……」 또 다른 해방가도 있었다. 「잊으랴 잊을소냐 해방의 이 날……」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압박을 당하지 않고 자유롭게 우리의 말, 우리의 글, 우리의 국기 밑에서 살 수 있다는 그 사실 하나만이라도 우리는 감격스럽고 가슴 벅차 오르는 기쁨이었다. 나는 다른 날은 몰라도 8.15 광복절만은 꼭 국기를 게양하고 내 고향 포천의 기뻤던 8?15를 생각한다. 3.1만세를 높이 불렀던 「만세교」다리, 해방의 함성을 높이 울렸던 「장거리」, 몸에다 폭탄을 안고 적 탱크에 뛰어들었던 「추부대용사」들의 기념비적 유적을 모두 함께 기억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