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에 서브프라임으로 촉발된 미국경제가 시장의 붕괴 직전까지 가는 상황을 직면하게 되면서 20년대의 경제공황을 떠올리게 할 만큼 전 세계에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더 이상 무기력할 수 없는 지구촌, 물론 정치적인 이데올로기가 강요된 시대는 아니지만 달러의 강세를 바탕으로 한 미국의 경제적 패권주의가 가져온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세계 각 국은 자율적인 해결책을 내세우며 위기를 극복해나가고 있는데 오히려 자국의 문제점을 냉철하게 진단하면서 미국에만 매달리기보다는 스스로의 해결점을 찾는 긍정적인 계기가 되고 있다.
요즘의 경제상황은 특히 1970년대 뮤지컬 시장의 상황과 유사하다. 그동안 전 세계의 뮤지컬 시장은 마치 미국이 뮤지컬을 만들어 배급해 주는 관계처럼 인식되어져 왔다. 하지만 1970년대 들어서서 브로드웨이는 또 한 번 엄청난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뮤지컬계에 새로운 인물의 등장도 없었고 새로운 시도도 없었다. 1960년대 까지 왕성하게 활동하던 작곡가들과 작사가들은 더 이상 히트작을 내놓지 못했고 흥행뿐만 아니라 평단의 평가에도 참패했다. 더욱이 인건비를 포함한 공연제작비가 증가하면서 제작자들은 자금을 모으기가 더욱 힘들어졌고 텔레비전이나 티켓 가격이 훨씬 저렴한 영화와 경쟁하면서 관객들을 집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서는 어느 시대보다도 더 막대한 제작예산을 세워야하는 이중고를 겪어야 했다. 다른 나라에 뮤지컬을 수출하기는커녕 당장 브로드웨이에 붙일 작품을 구하기도 힘들었는데 전 세계의 뮤지컬 시장이 동시에 타격을 받았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브로드웨이와는 다른 새로운 뮤지컬의 시대가 유럽, 특히 영국에서부터 도래하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세계 어느 나라나 공연예술계는 경제적 부가가치가 적기 때문에 투자자를 구하는데 항상 어려움을 겪어왔고 새로운 양식의 공연예술이나 상업성이 높은 매체가 생겨나면 그나마 도움을 주었던 투자자들도 곧바로 방향을 선회하곤 했다. 이것이 전 세계가 자금력을 갖춘 미국의 뮤지컬 시장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요인이었다. 그러나 19세기에 가장 대중적이며 흥행성을 갖춘 멜로드라마(Melodrama)도 19세기 말에 영화가 생겨나면서 결국 쇠퇴의 길을 걸었고 1930년대는 경제공황으로 많은 순수예술 종사자들이 할리우드로 발길을 돌렸던 아픔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브로드웨이는 몇몇 작곡가와 제작자들의 살신성인으로 그 명맥을 유지할 정도였지만 TV의 출현으로 인해 뮤지컬 제작자들뿐만 아니라 주요 영화사들조차도 발 빠른 행보로 텔레비전이라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며 부를 축적해 갔다.
지방에서 시험공연을 거쳐 검증된 작품이 브로드웨이에 입성하는 형식을 지켜온 미국 뮤지컬 시장은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지방극장 사정이 나빠지고 그 결과로 지방 시험공연 비용도 늘어나게 되면서 제작자들은 바로 브로드웨이에 작품을 붙이고 단지 몇 일간의 시연회로 대체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완성도 높은 작품을 만들기에는 시간과 돈이 더 많이 필요했는데 대형영화사를 포함한 브로드웨이의 투자자들은 공연투자를 포기하고 엔젤투자에 몰려들었다.
엔젤투자란 보통 돈 있는 개인들이 혼자서 혹은 함께 모여서 투자모임을 결성하고 벤처기업이나 새로 창업하는 회사에 투자하면서 주식지분으로 대가를 받는 형태를 말한다. 위험성이 많은 투자형태였지만 1970년대 투자자들은 엔젤투자 쪽을 선호했다. 마치 현재 우리나라의 영화투자자들이 영화투자에서 손을 떼고 다른 방향으로 투자를 선회하면서 영화시장을 공황상태로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인물도 없고 돈도 없는 브로드웨이는 그야말로 세계의 공연문화를 이끌고 있다는 자존심에 상처를 받았고 20세기 최대의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물론 당시의 정치상황이 공연예술에 큰 영향을 주었던 것도 아니다. 1972년에 베트남 전쟁은 미국의 패전으로 끝을 맺었지만 미국인들이 새로운 각오를 다지는 계기가 되었고 당시 대통령이었던 닉슨이 워터게이트사건으로 대통령직을 사임하며 큰 충격을 안겨주었지만 미국은 다시 보수적이 되면서 어느 시대보다도 돈이 더 중요시되는 사회가 되었다.
바다 건너 영국에서도 보수화의 길을 걷고 있었는데 더 이상 히피족이 활보하는 세상이 아니었으며 모두가 록 음악에 심취하고 있었던 시대였다. 이렇듯 1970년대는 보수적인 시대에 경제적인 안정에 큰 의미를 둔 시대였다고 할 수 있는데 새로운 세대의 작사가와 작곡가들이 출현하지 못했고 투자는 더욱 위축되면서 뮤지컬계의 주도권이 브로드웨이에서 영국의 웨스트엔드로 넘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국의 뮤지컬이 가장 큰 성공을 거둔 것으로 1960년에 초연된 <올리버(Oliver)>를 들 수 있다. 1960년에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초연된 <올리버>는 대성공을 거두고 1964년 브로드웨이로 입성하면서 역시 장기공연의 흥행기록을 세웠는데 그나마 영국 뮤지컬의 위상을 심어준 작품으로 평가되었다. 그렇지만 1970년대 들어와서 단 한 사람의 작곡가가, 그것도 1980년대까지 20년 넘게 브로드웨이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뮤지컬계를 석권했는데 그가 바로 앤드류 로이드 웨버(Andrew Lloyd Webber, 1948~)였다.
물론 논란의 여지가 많은데, 이에 필적할 만한 인물이 당시 미국의 브로드웨이에 이미 존재해 있었다. 뉴욕 타임즈가 극찬했듯이 (미국) 뮤지컬 공연계에서 가장 위대한 예술가 스티븐 손드하임(Stephen Sondheim, 1930~) 이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1957> 이후에도 건재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인의 자존심으로 볼 때 영국인 웨버는 흥행성 면에서 그리고 형식적인 스타일에서 성공한 작곡가이고 손드하임은 깊은 내용을 지니고 예술성에서 한층 뛰어난 인물로 평가하고 있는데 사실 그 평가가 전부 틀리지만은 않다.
그렇지만 평론가마다 평가가 매우 다르듯이 웨버가 당세풍이라는 작사가 러너의 사견은 아직도 웨버의 음악과 작품이 20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큰 인기를 얻고 있다는 점에서 역시 영국에 대한 미국의 자존심어린 질투처럼 보인다.
관객의 취향에 따라 다소 지적이며 진지한 손드하임이 좋을 수도 있고 감미로운 음악과 화려한 무대를 더 좋아하는 관객이 있을 법 한데, 어쨌든 1970년대의 전 세계의 뮤지컬계는 웨버와 손드하임이라는 두 거장의 출현만으로도 행복했던 시기였다. 90년대 초까지 두 사람의 전설이 계속되었으며 현재까지도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에서 그들의 뮤지컬을 심심치 않게 접할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