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투쟁정신과 승부의 세계는 냉정하고 결사적이다. 예술창작성과도 닮은 데가 실로 많다. 관중도 그러할 때 박수와 환호를 보낸다. 어떠한 핑계와 전술로도 승부의 결과를 합당화 할 수 없다. 차라리 결과에 깨끗이 승복하는 것이 도리어 아름다운 모습이며 당당한 정신이다. 그러나 그것은 규칙과 벌칙에 대한 엄격하고 공정한 심판과 운동의 품격이 전제된다.
누가 생명운동의 소중함을 가장 먼저 일깨워 주는가, 누가 사랑의 기적을 확실히 알게 하는가, 라고 물으면 나는 故 장기려 박사를 우선 꼽는다.
“환자가 곧 자신이라고 생각하면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던 고 장기려 박사의 어록이 떠오른다. 그는 한국의 시바이처이며 가난한 자들의 성자였다. 그가 마지막 순간의 육신을 누인 곳은 병원 옥상 옥탑방 이었다. 그는“사람으로부터 바보라는 소리를 들으면 바로 그것이 성공한 삶”이라 하였다.
인간이 어디 흠이 없을까마는 불가능에 대한 끈임 없는 도전과 완정에 이르는 역정은 험난하고 경이롭다. 작금 애매모호한 창작물을 헹가래 치며 떼를 지어 중독되는 환각적 예술의 찬사보다는 인간의 존엄을 부르짖어 생명의 존중을 노래하고 힘들고 어려운 이들에게 따뜻한 물 한 모금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다정다감하고 교양 있는 창의적 지성인이 그립다.
그동안 얼마나 지식과 지성이 인간의 아름다운 본성에 때로는 상처를 주었던가. 새 아침에 뒤돌아봐도 좋을 일이다. 오만한 지성이 시대의 쓰러진 풀을 몇 포기나 일으켜 세웠으며 타개진 논두렁에 말뚝을 어떻게 박았는가. 아니 난장판이 된 담벼락의 낙서를 얼마나 지웠으며 두레박으로 길어 올린 물지게를 져 본 적이 있는가. 하나만 더 묻자. 세상사 아버지의 굽은 등에서 돌멩이를 몇 개나 들어냈으며 어머니의 따비밭에서 깜부기를 몇 포기나 뽑았는가.
부싯돌도 살갗을 부벼 불씨를 낳는다. 그 불씨 하나로 지구를 끝장낼 수도 있다. 하물며 사람과 사람이 살을 섞어 빚어낸 생명은 그 얼마나 소중하고 또 위대한가. 그 예술품에 지식이 들어가 탑을 쌓아 지성을 낳았다. 그러나 그 지성은 오만과 때로는 편견으로 사람의 성품을 되려 망가뜨리고 나아가 문명의 이기로써 다시 사람을 죽이는 무서운 변태가 되기도 했다. 지성의 변태는 핵보다도 그 위력이 무섭고 추악하다. 그러함에 대항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카인의 전철을 밟아 모순이 난무할 뿐이다.
이제는 지식과 지성을 양식으로 삼는 이들이 과식하여 엄살 부리는 병원의 침상에서 그만 내려와야만 한다. 우직한 소는 표정으로 인사하지만 영특한 사람은 악수로 인사한다. 바보는 눈으로 과일을 따지만 지성은 칼로 과일을 벗겨 먹는다. 바보의 웃음과 울음은 눈치를 보는 법이 없다. 그러나 지성의 웃음과 울음은 변명과 이해를 요구한다. 바보는 꿩의 깃으로 침을 발라 괴발개발 꿈을 꾸지만 지성은 펜으로 잉크를 찍어 내일을 그럴싸하게 늘어놓는다. 지식의 상다리가 부러지는 것보다 똥장군 지게다리가 부러져야 배도 부르고 가슴도 뜨겁다. 어디 캠퍼스의 매미가‘지식이 지성’이라 울며 개천가의 여치가‘무식이 바보’라 울던가. 미안하지만 소위 지식과 지성인이, 가진 자와 특권층이 어깨를 풀고 더 반성해야 한다.
그렇다. 감사가 감사받지 말고 감사가 감사하는 사회가 됐으면 얼마나 좋을까. 사람이 사람과 사람으로 사람이 되어 사람을 만나러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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