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하나의 수식어로 규정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 몇 개의 수식어를 나열하기도, 다재다능하다는 말로 뭉뚱그려버려 설명하기도 마땅치 않은 사람들 말이다. 그를 두고서도 어떤 이는 ‘포천 연극의 대부’라고 말하고 어떤 이는 ‘포천을 대표하는 판화가’라고도 한다. 그는 바로 포천 예술계를 논의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사람, 황행일씨다. 그는 몇 차례 개인전을 가진 화가이고 문단에 등단한 작가이며 많은 연극인을 배출해낸 기획자이자 국어교사이다. 하지만 정작 본인 스스로는 “미술에 가장 애착이 많이 간다”고 스스럼없이 털어놓는다. 어린 시절부터 미술에 소질이 있어 미술반에 빠지지 않고 들곤 했다. 고등학교 재학 중에는 판화에 특히 심취해 일요일에도 골방이나 미술실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국전’의 참가자격이 비교적 자유로웠던 60년대 초,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던 황 씨는 국전 판화부분에 당당히 입선하게 된다. 고등학생 신분으로 화단에 등단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 후 홍익대학에 응시했다가 실패하면서 그는 자칫 미술과는 거리가 있는 듯 보이는 장교와 교련교사라는 직함을 차례로 갖게 된다. “그 때에도 항상 가방에 스케치북과 펜을 가지고 다녔어요. 군인 신분으로 개인전도 두 차례 갖었죠. 어떤 자리에 있든 무엇을 하든 그림을 손에서 떼어본 적은 없어요.”
포천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포천종고에서 교사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다. 교사생활을 하면서 국어교사로 전과했고 ‘문학세계’를 통해 문단 등단도 했다. 연극을 담당하던 교사가 전출을 가게 돼 아이들의 권유로 대신 연극반을 맡게 되면서 연극에도 발을 들여놓게 된다. 현재 그의 지도를 받은 많은 제자들이 연극무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중이다. 황씨는 “연극반 제자들만 생각하면 마음이 뿌듯하고 보람도 느낍니다. 정말 자랑스럽죠”라며 한참동안 그 시절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실타래 풀리듯 진행되던 이야기 도중 포천예총 창립에 즈음하여 황씨의 목소리가 커진다. 예총 창립의 구성요건을 맞추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아슬아슬하게 인증을 받았어요. 당시에 준비했던 사람들 모두 고생이 많았죠. 그래서인지 잘못되는 걸 보면 화도 많이 나고…” 그만큼 애정이 크다는 것일 터. 또한 이런 애정이 바탕이 되기에 쓴 약이 되는 이야기도 거침없이 이어진다. “포천 예술계는 너무 폐쇄적이에요. 문화라는 것은 활짝 열어놓고 개방해야 발전이 되는 것인데…. 포천과 예술에 대한 애정, 좋은 작품을 만들고자 하는 열의를 가진 사람들에게 기회를 줘야 하죠.”올해 환갑을 맞은 그는 올해부터 매 해 3년 동안 스스로 기념사업을 계획했다. “시집 한 권 내고 개인전 한 번 하고 포천의 대표적인 인물 면암 최익현 선생에 관한 일대기를 연극화해서 무대에 올리고… 지금까지 해 오던 일들이죠. 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