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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걸의 플러스에세이 31] 찻물 한 컵의 얼굴

- 의미를 향한 인간의 의지에 대하여-
포천신문 기자 / ipcs21@hanmail.net입력 : 2026년 08월 10일
< 김종걸 / 수필작가 >

삶이란 때로 형체 없는 안개 속을 맹목으로 헤매는 일이다. 보이지 않아도 발을 내디뎌야 하고, 향방을 모른 채로 걸어야 한다. 어딘가에는 이 방황을 보상할 까닭이 있으리라는 아득한 믿음 하나로. 오래도록 가슴속에서 잦아들지 않는 물음이 있었다. 왜 살아야 하는가. 무엇을 위해 이 막막한 길을 견디는가. 그 질문은 한낮의 뙤약볕보다 뜨거웠고, 한밤의 고요보다 아득했다.

그 무거운 응어리에 균열이 간 것은 평생교육원의 작은 강의실에서였다. 주제는 ‘삶의 의미’였고, 강사의 입에서 한 심리학자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빅터 프랭클. 인간을 움직이는 가장 근원적인 동력은 ‘의미를 향한 의지’라는 그의 나지막한 명제는, 이론이라기보다 피 흘려 쓴 증언에 가까웠다.

그는 나치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있었다. 인간이 인간이기를 포기한 곳, 존엄이란 단어가 가장 먼저 마모되어 사라지던 비극의 최전선. 그는 그 지옥의 바닥에서 절망의 깊이를 측정했다. 삶의 이유를 잃어버린 이들이 어떻게 자신을 스스로 내려놓고 시들어가는지, 그 잔인한 과정을 기록했다.

수용소에서 배급되던 찻물은 온전한 차가 아니었다. 빛깔도 향기도 없이, 겨우 훈기만 감도는 맹물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 한 컵의 찻물 앞에서 사람들은 두 갈래로 갈라졌다. 본능에 끌려 단숨에 들이켜는 사람이 있었고, 온기가 식기 전에 얼마간을 남겨 얼룩진 얼굴을 닦아내는 사람이 있었다. 그 작은 차이는 절대 가볍지 않았다. 찻물로 얼굴을 씻어내는 행위는 세상이 자신을 짐승이라 부를지라도 스스로를 인간으로 대접하겠다는 아주 작은 선언이었다. 몸은 철창에 갇혔으되, 영혼의 키만큼은 내어주지 않겠다는 결연한 자존의 표식이었다.

강의실의 불이 꺼진 듯 정적이 흐를 때, 오래전 겨울의 기억 하나가 오한처럼 찾아왔다. 깊은 무기력에 침전되어 거울 앞에 서는 것조차 두려웠던 어느 날. 씻을 기운도, 거울 속 패배자와 눈을 맞출 용기도 없던 날이었다. 그러나 나는 시린 수전 손잡이를 돌려 차가운 물을 얼어붙은 얼굴에 얹었다. 손끝을 파고들던 차가운 감각과 멎을 듯 요동치던 숨소리.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 안의 단단한 무언가가 온통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 역시 나만의 방식으로 찌꺼기를 씻어내던, 처절했던 존엄의 신호였을지 모른다. 프랭클은 그 극한의 시간 속에서 의미 요법(Logo therapy)을 끌어올렸다. 인간은 어떠한 고통 속에서도 의미를 창조할 수 있다는 믿음. 의미는 주어지는 선물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자신의 '태도'가 선택하는 방향이라는 사실을.

오늘의 일상 또한 나 자신을 잃어버리기 쉬운 냉혹한 공간이다. 타인과의 비교, 끝없는 성과, 불안과 피로라는 비가시적인 창살 안에서 우리는 문득 쓸쓸해진다. 그때 프랭클은 질문의 화살표를 우리에게 돌려놓는다. "내가 삶에 물을 것이 아니라, 삶이 묻는 말에 어떤 태도로 답할 것인가"라고.

이제 아침마다 거울 앞에 서는 마음이 이전과 같지 않다. 오래 들여다보지 않는다. 그저 오늘 하루를 휘청이지 않고 건너갈 얼굴인지 가만히 살펴볼 뿐이다. 의미라는 것은 거창한 목적지나 화려한 구호에 있지 않음을 안다. 하루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침묵의 다짐, 타인에게 전하는 다정한 인사 한마디, 나를 조용히 보듬는 사소한 습관 속에 숨 쉬고 있다.

고통은 삶에서 완전히 소멸하지 않는다. 다만 의미가 태어날 때, 그 고통은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숭고한 무게가 된다. 인생이라는 단 한 번의 실험에서 승패를 가르는 것은 운명이 아니라 태도다. 삶이 던지는 가혹한 질문 앞에서 더 이상 거창한 해답을 준비하지 않는다. 차가운 물로 얼굴을 씻고, 다시 신발 끈을 매고, 단단한 목소리로 오늘을 시작하는 일. 오늘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인간다움이면 족하다.

안개는 여전히 짙다. 길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그럼에도 나는 오늘, 다시 한 걸음을 내디딘다. 비틀거릴지언정 의미를 찾아 걸어가는 이 길 위에서, 나는 매 순간 고요히, 다시 태어나고 있다.

◀ 작가 김종걸 ▶
○ 격 월간지《그린에세이》등단.
한국문인협회, 한국가톨릭문인협회, 경기한국수필가협회 회원.

○ 수필집
“울어도 괜찮아”(2024),
“언론이 선정한 한국을 빛낸 명수필”(2022,공저)

○ 수상
제17회 공무원문예대전(현, 공직문학상)수필부문 우수, 안전행정부 장관상 수상.(2014)
제17회,19회 경찰문화대전 산문부문 우수, 경찰청장상 수상.(2016, 2018)
제4회 경기한국수필가협회 수필 공모전 우수상 수상.(2021)
제6회 대한민국 다문화 인권문학상 공모전 동상 수상.(2025)

○ 현장경찰로 34년 근무, 경정(警正)으로 퇴직하였다.
재직 중 대통령 녹조 근정 훈장 수상, 모범공무원으로 국무총리 표창,
근무 우수로 경찰청장 표창, 서울특별시장 표창, 서울, 경기지방경찰청장 표창 등
다수 수상하였다.

*칼럼 및 기고는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포천신문 기자 / ipcs21@hanmail.net입력 : 2026년 08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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