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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의선비정신 = 78] 사재 김정국(思齋 金正國)... 가르치지 않고 처벌하는 것은 백성을 속이는 것이다

포천한시사 대표 리 효 종
포천신문 기자 / jun28258@gmail.com입력 : 2007년 10월 04일

김정국은 김안국의 동생이다. 그가 황해도 감사로 있을 때였다. 그 지역에 이동(李同)이란 자가 있었는데, 어느 날 밥을 먹다가 아버지와 말다툼을 벌였다. 성격이 급했던 그는 결국 밥그릇을 던지고 아버지를 때렸다. 그러자 마을 향리가 이를 고발하여 이동을 감영(監營)에 가두었다.

김정국은 감사로서 이 사건을 심문하게 되었다. 당시 아비를 때린 죄는 마땅히 중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심문을 하기도 전에 죄인은 순순히 자신의 잘못을 자백하였다. 김정국은 너무나 쉽게 죄를 자백하는 것이 괴이하여 죄수에게 물었다.


"너는 중한 죄를 지었다. 마땅히 사형에 처해질 것인데 너는 그 사실을 알고 있는가?"


 그러자 죄수는 깜짝 놀라며 대답했다.


"사형이라고요? 이놈이 무식하여 그 죄가 사형에 처해질 죄라는 것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김정국이 그 말을 듣고는 조용히 일러주었다.


"부자지간은 하늘과 땅, 그리고 임금과 신하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비를 때리는 것은 천리(天理)를 어기고 신하가 임금을 어기는 것과 같다. 임금을 거역한 죄는 곧 역모이니 사형에 처해질 것이다."


죄수는 낯빛을 바꾸면서 땅에 엎드려 말했다.


"제가 저지른 죄가 사형에 처해질 만큼 무거운 줄 알았다면 어찌 아비를 때렸겠습니까? 절 좀 살려주십시오. 앞으로는 성심껏 아버지를 섬기겠습니다."


김정국은 한참 동안 고민에 빠져 있다가 죄수에게 말했다.


"가르치지 않고 형벌에 처하는 것은 백성을 속이는 것이다. 이번 일도 가르치지 않아서 그런 것이다. 어버이를 공경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나 어리석은 백성이 어찌 저절로 깨우칠 수 있으리요."


이윽고 그는 죄수를 곤장형에 처한 다음, 이내 석방하였다.


어느 해 그는 황모(黃某)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그대가 재산 모으기를 그만두지 않는다는 말을 내가 도성에서 들었네, 과연 사람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제 재산 모으기를 그만 두고 고요하게 살면서 천명에 순응하느니만 못하네. 사람이 세상에 나서 일흔 살이면 오래 사는 것이니 가령 나와 그대가 오래 산다고 해도 남은 것은 불과 10년이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노심초사하며 떠들고 지껄이는 자들의 입에 오르내린단 말인가.


내가 20년을 빈곤하게 사는 동안 두어 칸 집에 두어 이랑 밭을 갈고, 겨울 솜옷과 여름 베옷이 각 두어 벌 있네. 집이 두어 칸이나 되니 내가 눕고도 남은 땅이 있고, 옷을 입고 있어도 벽에는 여벌옷이 걸려 있으며, 밥그릇 밑바닥에는 남은 밥이 있네. 나는 이 세 가지 남은 것을 가지고 한 세상을 편하게 지냈네. 비록 천 칸짜리 집과 만 섬의 곡식과 백 벌의 비단옷을 보아도 썩은 쥐같이 여겼고, 이 한 몸 살아가는 데 여유가 있었네.


듣건대 지금 자네의 의식주가 나보다 백 배나 많다고 하는데, 어찌하여 만족할 줄 모르고 쓸데없는 물건을 모은단 말인가?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은 책 한 시렁과 거문고 하나, 벗 한 사람, 신발 한 켤레, 베개 하나, 바람 부는 창 하나, 햇볕 쬘 마루 하나, 차를 달일 수 있는 화로 하나, 늙은 몸을 부축할 지팡이 하나, 봄 경치를 찾아다닐 때 몸을 의지할 나귀 한 마리뿐이네, 이 열 가지는 비록 번거롭기는 하지만 하나도 빠뜨릴 수 없는 것이네.


늙은이가 만년을 보내는 데 있어 더 이상 바랄 것이 무엇인가? 분주하고 고단한 중에도 매양 예전의 언덕과 골짜기에서 누리던 재미가 생각날 때면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몸을 빼낼 방법이 없으니 어찌하겠나.」




김정국(金正國)


1485년(성종 16) ~ 1541년(중종 36).


본관은 의성이며 자는 국필(國弼). 호는 사재(思齋)이다. 열 살과 열두 살 때  부모를 모두 여의고, 이모부에게서 양육되었다. 1509년(중종 4)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후 이조정랑, 사간, 승지 등을 지내고, 1518년 황해도 관찰사가 되었다.


다음 해 기묘사화로 삭탈관직되어 고양(高陽)으로 내려가 「팔여거사(八餘居士)」라 칭하며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였다. 1537년에 복직되어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으며 그후 병조참의 · 공조참의를 지내고, 경상도 관찰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병으로 관직을 사퇴하였다가 뒤에 예조·병조·형조의 참판을 지냈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사재집』을 비롯해 『성리대전절요(性理大全節要)』, 『역대수수승통입도(歷代授受承統立圖)』, 『사재척언』등이 있으며,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포천신문 기자 / jun28258@gmail.com입력 : 2007년 10월 0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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