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개와 정광필은 금석같이 굳은 우정을 나눈 친구 사이였다. 하루는 중종이 정광필에게 물었다.
"그대에게는 친구가 있는가?"
그러자 정광필이 대답했다.
"신에게 친구는 별로 없고 오직 신용개 한 사람만 있을 뿐입니다."
그 후 신용개가 중종을 알현했을 때 중종이 다시 물었다.
"그대에게는 친구가 있는가?"
그러자 신용개가 대답했다.
"정광필이 신의 친구입니다."
임금이 이 말을 듣고 감탄하며 말했다.
"두 사람은 진정한 친구로다!"
신용개는 성격이 호탕하고 절개가 있었으며 술을 좋아하였다. 때로는 계집종을 불러 술자리에 앉혀놓고 서로 잔을 기울이며 취해 쓰러진 다음에야 술자리를 파하기도 하였다.
그는 집에서 국화 여덟 분(盆)을 길렀다. 어느 해 가을, 여덟 분의 국화가 꽃을 활짝 피웠다. 얼마나 탐스럽게 자랐는지 마루에 들여놓으니 높이가 대들보에 닿을 정도였다. 그는 국화꽃 향기를 유독 좋아하여 대청에 들여다놓고 늘 완상하였다 하루는 퇴근을 한 후 집안 사람에게 말하였다.
"오늘 좋은 손님이 여덟분이나 오실 터이니 술과 안주를 마련해 놓으시게."
그러나 음식을 차려놓고 아무리 기다려도 손님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윽고 해가 저물고 밤이 늦어지자 집안 사람들이 물었다.
"벌써 술상을 준비해놓았는데 손님들이 오시지 않고 있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거라."
둥근 달이 떠 빛이 대청안으로 들어와 국화꽃은 난만하고 달빛은 교교하였다. 그때서야 신용개는 집안 사람들에게 술상을 내오라고 일렀다. 집안 사람들이 술상을 내오자 그는 국화꽃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덟 송이의 국화꽃이 나의 손님들이다."
그러고는 국화꽃 앞에 좋은 안주를 차려놓고 술병을 들었다.
"내가 먼저 술을 따르리다."
그는 여덟 송이의 국화꽃에 각각 두 잔씩 따라주고는 자신도 얼근히 취하였다.
신용개(申用漑)
1463년(세조 9) ~ 1519년(중종 14).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자는 개지(漑之). 호는 이요정(二樂亭). 송계(松溪). 수옹(睡翁)등이다. 신숙주의 손자이며, 김종직에게서 배웠다. 1483년(성종 14) 사마시에 합격하고 1488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그해에 승문원에 등용되었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이라 하여 한때 투옥되었으나 곧 석방되어 직제학을 거쳐 도승지가 되었다. 1502년 왕을 기피하는 인물로 지목되어 충청도 수군절도사로 좌천되었다가 이듬해 형조판서를 거쳐 예조참판에 올랐다. 그러나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다시 전라도 영광에 유배되었다.
중종반정 후 형조참판에 임명되었고, 이후 대제학·우참찬·대사헌을 거쳐 이조·병조·예조의 판서를 지내고 우찬성이 되었다. 1516년에 우의정·1518년에 좌의정이 되었다. 문명을 떨쳤을뿐만아니라 인품 또한 꼿꼿하여 당시 선비들의 중심이 되었다.
저서로는 『이요정집』이 있으며,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