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에 단행된 토지개혁은 조선 왕조 토지제도의 근간이 되었다. 과전을 이용하여 개혁 세력은 귀족들의 농장을 몰수하여 신흥관료에게 재분배하였다. 과전은 세습될 여지가 많았으며 전시과에 비해 지주적 성격이 농후해 단순한 전시과 체제로의 복구는 아니었다. 과전법에 의해 관리는 현임이냐 전임이냐를 불문하고 18등급의 관직에 따라 과전을 지급받았다. 과전으로 지급되는 지역을 경기 지역으로 제한하여 관료의 생활 기반을 중앙에 두게 하여 지방 호족으로 성장하는 것을 억제하자는 목적에서였다. 과전은 원칙적으로 1대에 한했으나 수신전, 휼양전, 공신전, 별사전 등의 각종 명목으로 실질적으로 세습화되어 가는 경향을 보였다.
한편 과전 등의 증가는 신진 관료에게 지급할 토지의 부족을 야기하여 과전의 3분의 1을 충청, 전라, 경상도로 이전하였고 후에 다시 경기도로 한정시켰다. 세조 11년에는 과전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이를 폐지하고 직전법으로 대체하였다. 직전제는 수조권(收租權)을 현직 관료에게만 주었으나 16세기경에는 사실상 유명무실하게 되었고, 대·소 관료들은 녹봉만을 받게 되었다.
조선 왕조의 토지제도는 왕토 사상 및 토지 국유화에 입각하여 국가에서 직접 수조(收租)함을 원칙으로 하고, 공전 이외의 토지는 적절히 분배해서 수조권을 위임하는 것이 기본 형태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세습으로 많은 토지가 사유화되어 왕토 사상이 부정되었다. 대부분의 전주들은 병작제로 수확량의 반을 받아냈다. 그리고 전주는 수확량의 10분의 1을 세금으로 국가에 바쳤다. 이러한 병작 반수제는 과전이나 공신전 등에도 확대 적용되어 조선 초부터 양반들에 의한 토지 사유는 날로 증가하는 양상을 보였고 그것은 고려 때나 다름없이 농장을 발전시켰다.
양반 관료와 지방 토호들은 매입, 겸병, 개간 등 각종 방법을 동원하여 농장을 확장하여 계층 간의 갈등을 증폭시켰으며, 농장은 노비들이 주로 경작했으나 양민들도 전호로서 경작하였는데 신분상 천민으로 취급되어 요역과 공납 등이 면제되었다. 이에 양민이 자신의 땅을 농장에 투탁하거나 유랑 생활을 하던 양민들이 농장으로 흘러 들어가기도 하였다. 전주와 전호 사이의 관계는 병작반수로서 수확을 절반씩 나누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국가 재정의 파탄을 가져왔다. 농토는 황폐해졌으며 경작 면적은 줄어들었다. 또 토지대장의 상실을 기화로 고의적으로 대장에서 누락시킨 토지가 발생하였다. 양란 이전 170만 결(조세를 계산하기 위한 논밭의 면적 단위)에 달하던 토지가 광해군 시대에는 54만 결로 대폭 줄어들어 조세 수입이 감소하였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공물을 미곡으로 대납시켜 공납의 전세화를 구상하였다. 단위 경작 면적에 대해 일정한 세미를 징수하고, 징수한 공납미를 관에서 지정한 공납 청부업자에게 지급하여 궁이나 관에서 필요로 하는 공물을 조달케 하자는 방법이었다. 미곡 대납제는 전란 후에 부족한 정부 양곡을 보충하여 민생을 안정시키려는 의도가 있었으며 종래에 불법적으로 행해진 공납 청부의 관행을 일정한 규제 하에서 합법화시키자는 의미도 지녔다.
미곡 대납제는 율곡 이이가 선조에게 바친 동호문답에서 상소한 수미법에서도 나타나 있었으나 이러한 주장은 임진왜란 이전에는 시행되지 않았고, 광해군 원년에 이원익의 주장에 따라 우선 경기도에서 시범적으로 시행되었으며, 그 후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를 거쳐 숙종 34년에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각종 토산물 대신에 일률적으로 징수한다는 의미에서 이 제도를 대동법이라고 불렀으며 징수되는 미곡을 대동미라고 하였다.
대동법은 우리나라 자본주의에 있어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대동법의 당초 목적은 조선 왕조의 재정 확보에 있었지만 이의 실시는 국가의 수요를 경제 외적인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상품 매매를 통해서 조달하게 하여 자본주의의 요체인 시장의 발전을 가져왔다. 대동법의 실시는 공물을 조달하는 광범위한 계층의 수공업자를 등장시켜 봉건 왕조의 수요를 충당하던 종전의 관영 수공업을 사영 수공업으로 대체하는 효과를 가져왔고, 이에 사영 수공업이 비약적으로 성장하였고 특정 물품의 전매권을 가진 시전이 급속도로 성장하였다.
전국의 농민 수공업자들이 빈번한 접촉으로 시장을 위한 생산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봉건적 조세 수취 체제로서의 결부제는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으며 교환 경제의 발달, 사유 재산의 형성, 생산력의 증가에 따른 합리적 농업 경영 단위로서의 두락제가 전면에 나타났다. 시장의 발달과 시장을 위한 생산은 상호 작용하면서 촉진되었고 상품 유통을 매개하는 보부상, 객주 등의 상인들이 성장하였다.
상업 자본의 역할은 처음에는 봉건제의 붕괴 작용으로 한정되었다. 그러나 점차 생산 활동과 결부되면서 자본주의의 싹이 트였다. 부상대가들이 토지에다가 자본을 투자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상업자본이 토지자본으로 변하기도 했으나 토지에 상업자본이 침투하면서 토지를 가지지 못하게 된 많은 농민들은 생존을 위해 자기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팔게 되었다. 이렇듯 조선 후기에 자본주의적인 요소가 우리 생활에 존재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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