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이, 달서, 고리, 아리(慶李, 澾徐, 高李, 牙李)」라는 말이 전해 오고 있다. 포천에서는 「경주 이씨」「달성 서씨」「고성 이씨」「아산 이씨」를 빼 놓고는 행세하는 집안(가문)을 찾기 힘들다는 얘기로 다시 말해서 포천의 4대 명문가를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약봉 서성 선생은 누가 뭐라 해도 예나 지금이나 포천의 최고 명문가임에 틀림이 없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영의정에 추증되고 「충숙공(忠肅公)」의 시호가 내려졌으며 대구(달성) 귀암서원에 제향되고 포천 설운리에 묘가 있다.
「약봉」이 별세 후, 300년간(인조조~고종조) 문중에서 영의정이 8명, 우의정이 1명, 대제학을 6명을 배출한 명문가로 위세를 떨쳤으니 최고 명문의 자리는 굳건하였다고 볼 수 있다.
홀어머니(맹인)이자 어진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들고 산 효자여서 40여년간 관직에 있으면서 뛰어난 지략과 노력으로 국가와 민족을 위해 귀감이 된 위대한 인물이었다.
맹인 현모께서는 부가 23세의 젊은 나이로 조졸(早卒), 위탁했던 숙부「서엄」마저 졸하자 서울 약현(藥峴)으로 이사 약주, 약과를 팔아 뒷바라지를 하며「율곡」「귀봉」문하에서 공부를 시켜 등과하고(1586년 선조 19년) 병조좌랑(1592년 선조 25년)으로 임진왜란을 맞아 왕을 호종하고 호소사(號召使) 황정욱의 종사관이 되여 왕자 임해 순화군을 구출하는 계교를 낸 지략가였다.
1624년(인조2년)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데 큰공을 세워 종1품 숭록대부 판중추부사가 되고 인조5년 정묘호란 때에도 왕을 호종하고 큰공을 세우기까지 국란이 있을 때마다 충성을 다한 공신이었으며 인조9년(1631년) 74세로 서거하였다.
송우리에는「벼락바위」가 있는데 약봉 선생의 조상의 뜨거운 효심(孝心)의 전설이 우리를 감동시키고 있다.
「명당자리에 묘를 쓰면 큰아들이 죽는다는 지관(地官)의 말을 듣고도 죽음을 무릅쓰고 묘를 쓰다가 벼락을 맞아 죽을 뻔한 이야기이다.」
그 유서 깊은 바위는 깨진 틈에서 향나무가 자생(自生)하여 효심(孝心)을 말하는 듯 서있다. 필자도 차를 타고 송우리「벼락바위」곁을 지나면서 전설을 듣던 게 어제 같다. 「약봉」의 후손 중에는 포천의 초대 제헌의원 서정희(독립운동가)님과 군수 서장석씨(해방직후 초대 포천면장.농협장) 6군단장을 역임한 서경석중장 외에도 훌륭한 후손들이 명문가를 자랑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