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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의 선비정신 = 72] 공명정대(公明正大)한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

리효종 (포천한시사 대표)
포천신문 기자 / jun28258@gmail.com입력 : 2007년 07월 31일

김안로는 자신의 아들 희(禧)가 장경왕후의 첫째 딸과 혼인하자 갑자기 승진하여 이조판서가 되었다. 그는 전횡을 일삼으며 호곶목장(壺串牧場)을 떼어 자신의 밭을 만들려고 했다. 그때 정광필은 사복제조(司僕提調)로 있었다. 정광필이 김안로의 음모를 알고는 사람들 앞에서 말했다.

"그곳은 나라에서 말을 기르기 위해 만든 목장이다. 결코 세도 있는 집에 갈라줄 수 없으니, 갖고 싶거든 내가 늙어 죽은 뒤에나 하라."


이때부터 김안로는 정광필에게 원한을 품게 되었다. 그 후 인종의 어머니 장경왕후의 희릉(禧陵)을 옮길 때 정광필이 책임을 맡았는데, 김안로는 좋지 않은 땅에 능을 옮겼다는 이유로 정광필을 귀양에 처하라고 요구했다.


정광필은 결국 파면되어 회덕에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오랜 정승생활에도 집안이 가난하여 반찬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였다.


하루는 관리 한 사람이 앞산에서 사냥을 하였는데, 마침 그에게 쫓기던 사슴 한 마리가 정광필의 집 울타리 안으로 도망쳐 들어왔다. 그러자 정광필의 아들들은 하늘이 주는 선물이라 여기고 사슴을 잡아 아버지에게 반찬을 만들어주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고을수령이 사람을 보내 말했다.


"높은 사람에게 진상할 물건을 훔쳐 먹었으니 이는 벌을 받아야할 죄로다."


그러고는 날마다 사람을 보내 사슴을 내놓으라고 독촉하였다. 그러나 산에 가서 잡을 수도 없고, 시장에 가서 구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온 집안 식구들이 어찌할 바를 몰랐다. 다행히 친척 중에 이웃고을의 원으로 있던 사람이 대신 노루를 갚아주었다.


그 후 정광필이 복직되어 도성으로 돌아 왔을 때, 조정에서 이 사실을 알고 사슴을 빼앗아간 수령을 파직하려 하였다. 그러나 정광필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잘 모르고 저지른 일일 뿐이오. 그 사람은 당시 권세를 잡고 있던 사람이 두려워서 나에게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니 책망할 일이 아니오."


정광필은 그 수령이 다시 관직에 머물 수 있도록 힘껏 두둔하였다.


회덕에 잠시 머물고 있을 때 그에게 김해로 귀양을 가라는 어명이 내렸다. 어명을 받은 금부도사가 서둘러 말을 달려 내려왔다. 정광필의 아내는 놀라 어쩔 줄 몰라했으나 그는 태연히 손님과 마주앉아 장기를  두었다. 금부도사로부터 귀양을 떠나라는 어명을 받은 그는 가만히 일어나 예를 갖추고 말하였다.


"임금님의 은혜가 지극하십니다.?"


이윽고 밤이 되어 잠자리에 들었는데 코 고는 것이 천둥소리 같았다. 그러고는 이튿날 봇짐을 메고 아들들과 함께 길을 떠났다. 그때 정승 이행(李荇)도 관서 지방으로 귀양을 떠났는데 김안로는 두 사람에게 이런 글을 보냈다.


"조정의 여론을 보건대 앞으로 두 사람을 대우해줄 것 같지 않으니 차라리 일찌감치 자결하는 것이 나을 것이오."


  이행은 편지를 받고 폭음하다가 병이 들어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정광필은 그 편지를 본 후 웃으며 말하였다.


"이 늙은 신하에게 죄가 있다면 아침저녁 사이에라도 죽여서 국법에 의해 일벌백계로 삼는 것이 옳다.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는데 어찌 감안로 따위가 나를 죽일 수 있단 말인가?"


훗날 김안로가 실각하자 조정에서는 정광필을 도성으로 불러 올렸다. 그러자 집안의 종들이 이 소식을 가지고 급히 영남으로 떠났다.


한밤중이 되어 종들이 도착했는데, 너무 급히 달려오느라 발이 부르트고 입이 말라 거의 쓰러질 지경이었다. 종들이 기진맥진하여 말을 못한 채 쓰러지자 정광필의 자제들이 놀라고 당황하여 종의 주머니 속을 뒤져보니 도성으로 올라오라는 기별이 들어 있었다.


자제들이 서둘러 아버지에게 달려가 그 사실을 고했다. 정광필은 그 소식을 듣고도 "그런가?"하고는 코를 골면서 달게 잠자리에 들었다.


정광필은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특별하였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식사를 하고 남은 음식을 손자 정유길과 증손자인 정지연에게만 먹게 하고 다른 자제들은 주지 않았다. 훗날 이들은 각각 좌의정과 우의정에 올랐다.


그때 이헌국(李憲國)은 정광필의 손자뻘 되는 친척이었는데, 어렸을 때 문안을 드리러 간 적이 있었다. 마침 정유길과 정지연이 집에 없자 정광필은 헌국을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종을 불러 남은 음식을 걷어다 주게 하였다. 헌국이 음식을 먹고 나오자 종들이 서로 웃으며 말하였다.


"저 사람도 정승이 될 팔자인가?"


그 후 헌국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다.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년(중종 14) 남곤(南袞), 홍경주(洪景舟)등의 훈구파에 의해 조광조 등의 신진 사류가 축출된 사건이 기묘사화이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연산군의 폐정을 개혁하고, 명망있는 신진 사림파를 등용하였다. 그러나 신진 사림은 도학사상만 강조하여, 훈구파를 배척하며 급진정책을 시행하였다.


이에 훈구파는 신진 사림과의 반목이 날로 심해지자 홍경주의 딸이 중종의 후궁인 것을 이용하여, 궁중 동산의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고 써놓았다. 이것을 벌레가 갉아먹어 글자 모양이 나타나자 그 잎을 왕에게 보였다."走" 와 "肖" 자를 합치면 곧 조(趙)자가되기 때문에, 곧 조(趙) 씨가 왕이 된다는 뜻이었다. 당시 신진 사림의 급진성에 염증을 느낀 중종은 이 사건을 빌미로 신진 사림들을 몰아냈다.


이때 조광조는 귀양을 가서 사사되고 김정, 기준, 한충, 김식 등은 귀양갔다가 사형 또는 자결하였다. 김구 등 수십 명도 유배되었으며, 이들을 두둔한 김안국과 김정국 등은 파직되었다. 이때 희생된 사람들을 "기묘명현(己卯名賢)" 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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