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수복 후, 서울 시내에는 교통 경찰관들이 수신호로 교통 정리를 하였다. 대개 해당 관내 경찰관 파출소 순경들이 담당하기도 하고 여자 경찰관들이 교통 정리를 하여 질서 유지에 힘썼다. 그런데, 서울 시내를 통행하는 차량이 많지 않던 시절이라 운전자들은 교통 경찰관들의 단속 태도를 평하는 이야기가 서울 장안의 화재가 되기도 하였다.
서울 창덕궁과 비원의 정문인 돈화문 앞, 경찰관 파출소는 매우 유명하였다. 별명이 「부처 순경」이었기 때문이다.
「부처 순경」경찰관은 포천 출신의 효자, 열녀의 후손,「심순경님」이었다.
돈화문 파출소 「부처 경찰관」,「심순경님」은 창덕궁과 비원을 6?25 후, 서울이 수복되었으나 개방하지 않던 시절 경비 책임자로 근무하기도 하였다. (경사대우)
더욱 놀라운 일은 종로 4가에서 광화문을 경유 중앙청(현, 경복궁 앞)으로 갈 일이 있어도 일부러 원남동으로 돌아서 심순경님이 교통정리를 하는 돈화문 앞을 지나서 중앙청으로 운행하는 운전기사가 많았다는 사실이다. 당시, 까다롭게 체크 당하고 검색 당하는 괴로옴을 피하고 안전하고 무사 통과에다 미소짓는 심순경님이 교통 정리하는 돈화문 앞 통과 차량이 유난히도 폭주하였다는 사실은 5, 60년 대를 서울에서 살아 본 사람들의 사실이기도 하다.
그만큼,「부처 순경 심순경님」은 유명하였다. 또, 창덕궁․비원 경비 책임을 맡고 있던 심순경님은 비원 내에 있는 밤, 도토리, 상수리, 가얌 등을 채취하도록 허가하여 당시, 미합중국과 UN화원국의 원조, 미국의 잉여농산물 식량 원조로 굶주림을 겨우 면하고 살던 시절 식량 사정을 조금은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 주었다는 얘기는 유명한 일화로 70대 이상은 기억하는 서울 사람들이 많다. (재경포천인)
그 당시, 비원은 개방이(10년 가까이)되지 않아 철새들의 낙원이었으며 밤, 도토리, 가얌 등을 몇 가마니씩 주워서 식량 보탬을 하는 서울 빈민의 낙원이었다, 평소 서울의 소시민들이 궁궐의 뒤뜰을 훼손치 않고 버려지는 나무열매를 식량 보탬으로 요긴하게 먹을수 있으리라는 아이디어는 심순경님의 부처님 같은 생각에서 비롯되었다고들 하였다. 심순경님은 평소, 청렴 결백하고 검소하여 늘, 생활이 그 당시 경찰관의 봉급으로는 가난하였다.
그러나, 의연한 자세로 경찰관 정년을 맞았던 심순경님이었다.
그 후, 「적덕지가 필유여경(積德之家必宥餘慶)」이란 옛 말 틀리지 않아 후손의 사업이 융성하여 주물제조공업계의 발전을 거듭하는 촉망받는 사업가가 되었으며 손자녀들도 조부님의 뜻으로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다니 심순경님의 후손답다는 생각이 들고는 한다.
심순경님은 자손들의 후한 인심과 효도를 받으며 여생을 보내셨다는 얘기를 들으면 효자 열녀의 후손답다는 생각이 들고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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