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원 화성(華城)은 조선 제 22대 정조대왕의 구상에 따라 조성된 성곽이자 신도시였다. 수원 화성은 정조가 생부(生父)의 묘소를 이장하고 그 자리에 있던 수원의 읍치(邑治)를 현재의 수원으로 옮기고, 주변에 성곽을 쌓아 조성한 성이다. 이 성곽은 당시 동서양 축성술이 집약된 것이었고, 오늘의 신도시와 같은 복합적인 기능도시를 건설한 쾌거이었다.
수원 화성은 조선의 축성술을 바탕으로 하여 중국과 서양의 기술까지 참조하여 쌓은 성이다. 수원 화성의 건설은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사도세자는 영조의 둘째 왕자로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당쟁에 휘말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뒤주 속에서 생을 마감한 왕자였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양주 배봉산(현재 서울 동대문구)에서 수원의 화산(花山)으로 이장하고 화산 부근에 있던 읍치를 수원의 팔달산(八達山) 아래로 옮기면서 화성을 건설하게 했다. 정조는 아버지의 묘를 이장하고 난 후 아버지의 묘에 여러 차례 행차하였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수원 화성 건설이 한창 진행 중이던 1795년의 행차이다. 이해는 아버지 사도세자와 어머니 혜경궁(惠景宮) 홍씨의 회갑이 되는 해였다. 정조는 어머니를 모시고 수원 화성에 가서 아버지 묘소를 참배하고, 화성 행궁(行宮)에서 어머니의 회갑 잔치를 크게 벌였다.
수원 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던 것이다. 또한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권을 실현하기 위한 정치적 포부도 담겨 있었다. 아울러 수도 남쪽의 방어시설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수원 화성의 건설로 수도 한양 외곽에는 네 개의 유수부(留守府)가 완성되었다. 네 개의 유수부는 광주(廣州)(동), 강화(서), 화성(남), 개성(북)이다. 이로써 수원은 조그마한 읍에서 지방 대도시로 발전하게 되었다. 성의 둘레는 약 5.7km, 내부 면적은 130ha로 동쪽 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다. 성에는 동, 서, 남, 북 네 곳에 대문이 있고, 공격과 방어를 위한 많은 군사 시설물들이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위치에는 행궁이 배치돼 있다. 행궁은 국왕이 행차할 때 머물기 위해 세워진 건물이다. 화성 건설에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정약용(丁若鏞)은 서양 선교사가 중국에서 펴낸 책을 참고하여 거중기를 만들었다. 거중기는 수원 화성 건설에 사용되어 공사기간을 단축하고, 공사비용을 줄이는 데 이바지했다. 그 결과 위와 같은 시설을 갖춘 성을 축조하는 데 약 2년 8개월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 안에 완성할 수 있었다.
그러한 시설들은 일제 강점기에 무분별하게 이루어진 시가지의 확장과 한국전쟁의 영향으로 인해 소실, 파괴되었다. 그러나 축성 직후 기록되어 남겨진"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의 도움으로 1970년대 이후 진행된 성곽의 원형 복원사업에 성공할 수 있었다.
성벽은 바깥쪽만 쌓아올리고 안쪽은 지세를 이용해 흙을 돋우어 메우는 방식을 썼다. 이와 같은 기술은 자연과 조화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또한 벽돌, 돌, 목재 등 재료들도 조화를 이루고 있다. 수원화성은 당시의 성곽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남북을 따라 흐르던 수원천이 현재에도 그대로 흐르고 있다. 또한 동서와 남북을 교차하여 잇는 가로망이 현재에도 도시 내부 도로의 주요 골격을 유지하고 있다. 이와 같이 200년 전 성이 축성되던 당시의 골격이 그대로 현존하고 있다.
화성 건설 직후에 발간한 기록은 사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크다. 이 책에는 축성계획, 제도뿐만 아니라 동원된 인력의 인적사항, 재료의 출처 및 용도, 예산 및 임금계산, 시공기계, 재료가공법, 공사일지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수원 화성은 중국, 일본 등 외국뿐만 아니라 국내 다른 읍성과도 다른 형태의 성이었다. 평지에 위치하고 있어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갖고 있다. 그에 따라 평시에는 일상생활이 이루어지는 주거공간으로 기능하다가 유사시에는 방어가 가능하도록 했다. 기존의 다른 읍성들에서는 일상생활만 가능했고, 방어능력이 없었다. 수원 화성 시설의 기능이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어 동양 성곽 축성술의 결정체로 평가받는다. 특히 당대 학자들이 충분한 연구와 치밀한 계획에 의해 동서양 축성술을 집약하여 축성하였기 때문에 건축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수원화성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