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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세계유산 = 12] 창덕궁(昌德宮)

1610년부터 1868년까지 258년 동안 정궁(正宮)으로 사용
포천신문 기자 / jun28258@gmail.com입력 : 2007년 07월 11일

 

창덕궁(昌德宮)은 1610년 광해군 때부터 1868년 고종이 경복궁을 재건할 때까지 258년 동안 정궁(正宮)으로 사용된,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궁궐이었다. 창덕궁에는 현존 가장 오래된 궁궐 정문인 돈화문(敦化門)을 비롯해 인정전(仁政殿), 선정전(宣政殿) 등의 정치공간, 왕과 왕후 및 왕가 일족의 침전(寢殿) 공간, 그리고 연회, 산책, 학문을 위해 존재했던 후원(後園) 등으로 이루어졌다. 창덕궁이 왕궁으로 사용되었던 17세기 초에서 19세기 중엽에 이르는 시기를 개괄해보면 이 시기의 정치는 반정(反正), 환국(換局), 탕평(蕩平), 세도정치(勢道政治) 등의 단어로 특징지을 수 있다.


17세기 후반부터는 한 정치세력이 반대파를 몰아내고 정권을 차지하여 철저히 탄압하는 환국이 되풀이되었다. 그러다가 18세기 중엽이 되면 한 당파가 일당독재를 하지 않고 다른 당파와 공존하는 탕평책이 추진되었다. 영조와 정조에 의해 이루어진 이 시기를"조선왕조의 르네상스기"라고 부른다. 특히 정조는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고 인재를 널리 등용하여 학문과 기술을 장려했다. 이러한 시대 분위기 속에서 실학도 활발히 전개되었다.


정조가 갑자기 죽고 그의 나이 어린 아들 순조(純祖)가 즉위한 이후 19세기는 조선 왕조 역사상 암흑기라고 할 수 있다. 나이 어린 왕을 대리하여 대비와 외척들이 정권을 독차지하여 여러 폐단이 생겼기 때문이다. 국왕의 외척, 그리고 그들과 연계된 몇 몇 가문 중심으로 국정이 운영되어 유능한 인재들이 희생되었다. 또 중앙 정치세력과 연줄이 닿은 자들이 돈으로 관직을 매수하여 백성들을 착취하였다. 조세제도, 군역제도, 환곡(還穀) 등 3정(政)이 문란해졌다. 그리고 홍경래(洪景來)의 난, 진주(晉州)민란 등 대규모 농민봉기도 이 시기에 발생했다.


창덕궁은 원래 조선 초기에 경복궁의 이궁(離宮)으로 지어진 궁궐이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전쟁이 끝난 후 다시 지었다. 이후 경복궁을 대신하여 19세기 중엽까지 정궁 역할을 했다. 20세기에 들어와서도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순종황제가 재위시에 궁궐로 사용했고, 1910년 한일병합 이후에도 여전히 이 궁궐에 거처하다가 최후를 맞기도 했다.


이 궁궐은 여러 번 화재를 겪었는데, 마지막으로 1917년에 대조전(大造殿)과 희정당(熙政堂) 등 침전 건물들이 화재로 소실되어 일제는 1920년에 경복궁에 있던 교태전(交泰殿)과 강녕전(康寧殿)을 옮겨 복원하였다. 창덕궁에 대한 기록과 모습은 조선왕조실록, 동궐도(東闕圖) 등에서 발견된다. 특히 1830년경의 작품인 동궐도를 통해 창덕궁의 건물배치와 건물형태를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아울러 이 그림은 1980년대 창경궁(昌慶宮)을 복원할 때 주요 참고자료가 되기도 했다. 궁궐은 일반적으로 크게 세 개의 영역으로 구분되었다. 정치 공간, 생활공간(침전), 후원이다.


조선 왕조의 궁궐은 다섯 개가 있었다. 각 궁궐에는 일정한 질서가 있었다. 특히 왕을 중심으로 정치가 행해지는 공간인 정전과 편전(便殿)에는 모두"정(政)"(정치라는 뜻)자의 이름이 붙여졌다. 또한 각 궁궐의 정문에는"화(化)"(교화의 뜻)자가 붙여졌다. 다만 경운궁(慶運宮)만은 예외이다. 그것은 대한제국 선포 이후에 다시 조성되었기 때문에 틀을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창덕궁 후원에는 부용지(芙蓉池)라는 연못이 있는데, 이 연못 뒤쪽에 주합루(宙合樓)라는 건물이 있다. 이 건물은 18세기 정조대왕 개혁정치의 산실이라 평가받고 있는 규장각으로 쓰였다. 주합루 뒤쪽 산 속에는 연경당(演慶堂)이라는 기와집이 있다. 99칸짜리 건물인 이 집은 궁궐 밖 사대부 집을 본떠 궁 안에 세운 것으로 국왕이 사대부의 생활을 체험해보고자 건립한 것이었다. 생활공간 가운데는 낙선재(樂善齋)라는 건물이 있는데, 이 건물은 최근인 1980년대 말까지도 대한제국의 황족들이 사용하였다.


 


창덕궁은 정궁이었던 경복궁의 건축양식을 모범으로 하여 건설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중엽 경복궁을 중건할 때에는 다시 당시 정궁 창덕궁의 건축양식을 참고하였다. 이로써 창덕궁은 경복궁에 진 빚을 갚은 셈이었다.


창덕궁의 여러 건물들은 국보와 보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창덕궁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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