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우영 (대진대 교수, 연출가)
최초의 북 뮤지컬과 최초의 유성영화가 탄생한 1927년은 세계의 뮤지컬이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기 시작한 원년으로 볼 수 있다. 초기의 뮤지컬 코미디와 무성영화는 보드빌(Vaudeville) 형식을 지닌 가벼운 뮤지컬로 이루어졌는데 1927년을 기점으로 탄탄한 줄거리를 지닌 뮤지컬로 거듭나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관객의 취향에 따라 위의 두 가지 형식이 공존했는데 뮤지컬의 대세는 역시 북 뮤지컬에 있었다. 그렇지만 1927년 이후 할리우드가 뮤지컬의 황금기를 만들어 가는 동안 브로드웨이는 북 뮤지컬이 일반화되기도 전에 경제공황으로 인해 커다란 위기를 맞는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의 승전국 미국은 전시 이득으로 얻은 막대한 자본으로 인해 경제호황을 맞이한다. 1920년대에 미국의 경기 상승을 가져온 이 과잉자본으로 인해 생산이 증대되고 주식 및 토지에 대한 투기가 성행하였으며 1920년대 말에는 그 정점에 이르렀다. 소득격차가 심화되고 소비가 생산을 따라가지 못해 경제 활동이 위축되는 상황에서 이미 과도한 투기가 주식시장의 문제로 대두되었고, 자동차와 건축, 기타 내구재에도 과잉투기가 초래되고 있었다. 또한 생산과잉으로 비롯된 세계 농업은 급기야 혼란에 빠지며 불황을 맞이하게 되었고 기본적인 실업률도 미국 경제공황의 원인으로 도사리고 있었다. 결국 주식시세 대폭락(Stock Market Crash of 1929)을 계기로 심각한 대공황이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경기는 계속 후퇴를 거듭해, 1932년까지 미국 노동자의 30퍼센트 가까이 직장을 잃고 거리로 내몰렸다. 불황의 영향은 즉시 유럽 경제에도 파급되어 특히 제1차 세계대전 채무국인 독일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영국을 비롯한 서유럽 국가에서도 수백만의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더욱이 나라마다 외국상품 수입에 반대하는 정책을 세움에 따라 블록 경제 (Bloc economy)를 초래했다. 블록경제를 가져온 경제공황은 정치에까지 영향을 미쳐 극단적인 이념을 내세운 정치세력이 확산되고 일명 자유민주주의는 점차 대중의 호응을 잃어가게 되었다. 더욱이 국가이익을 우선시하며 일당정부와 동의어로 지칭되는 전체주의(Totalitarianism)의 등장은 무솔리니와 히틀러를 대중의 영웅으로 만들면서 새로운 경제체계를 이루며 1930년대 후반에 또 다른 전운(戰雲)을 감돌게 했다. 이는 즉시 제2차 세계대전을 유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는데 일반적으로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39년까지 대량 실업과 불황에 시달렸다. 특히 1929년부터 1933년까지 최악의 장기적인 정체를 드러냈는데 회복할 기미도 보이지 못한 채 만성적인 불황으로 제2차 세계대전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경제 대공황으로 인해 미국에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분야는 역시 문화예술분야, 특히 브로드웨이였다. 의식주조차 해결할 수 없는 실업자들이 거리에서 구걸하는 현실 속에서 비싼 티켓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공연예술을 감상할 수 있는 여유 있는 사람들조차 티켓구입에 인색해졌고 투자자조차 없는 극장가는 한산하기만 했다. 반면에 할리우드는 브로드웨이보다 경제공황에 타격을 덜 받은 듯 보였다. 1927년 앨 졸슨이 <재즈 싱어>로 할리우드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수많은 브로드웨이의 작곡가 및 배우들이 영화사로 영입되었다. 또한 1930년대 지속적인 경제공황에 흔들리지 않았던 뮤지컬 영화와 갱스터영화의 성장은 당시 더 많은 브로드웨이 배우들과 보드빌 스타들을 영화로 끌어들이면서 브로드웨이는 더욱 정체되기 시작했고 보드빌도 빠른 속도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재즈 싱어>를 끝내고 브로드웨이로 돌아오겠다던 앨 졸슨이 할리우드에 곧바로 정착하게 되면서 앨 졸슨의 유명한 레뷰(Revue)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고 미국 뮤지컬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며 많은 극장을 소유했던 조지 M. 코핸의 극장들도 점차로 문을 닫게 되었다. 심지어 <지그펠드 폴리스(Ziegfeld Follies)> 시리즈와 최초의 북 뮤지컬(Book Musical) <쇼 보트(Show Boat)>를 제작하여 브로드웨이의 큰 손으로 자리 잡았던 플로렌츠 지그펠드(Florenz Ziegfeld, 1869˜1932)도 가족들의 생계를 걱정하게 될 만큼 전락했다. 안정된 제작여건을 마련하고자 주식에 투자한 전 재산이 주식시장의 붕괴로 인해 백지가 되어버리자 플로렌츠 지그펠드 인생 만년은 처절한 비극으로 끝을 맺었다. 경제 대공황이 지속되며 브로드웨이의 극장 중 60퍼센트가 문을 닫았으며 조지 M. 코헨과 당시 미국에서 가장 많은 극장을 소유하고 있었던 슈버트(Shubert) 형제의 극장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심지어 어떤 공연장들은 발 빠르게 영화관으로 전환하기도 했다. 공연작품들도 대공황 이전에 제작된 공연작품수의 절반도 되지 않는 숫자로 떨어졌다. 1930년대에는 능력 있는 브로드웨이의 뮤지컬 전문가들이 밥벌이를 위해 할리우드로 발길을 돌렸고 브로드웨이는 거의 공동화 현상을 초래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