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한시협회 포천지회장 리 효종
남효온은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이씨 밑에서 자랐다. 그의 성품은 담박하면서도 굳세고 초월하면서도 깨끗하였다. 일찍이 김종직 문하에서 공부하고, 김시습(金時習)을 스승으로 삼아 세상 밖을 거닐며 세속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사육신이 죽은 후 이들의 언행을 기록한 『육신전』을 지어 세상에 알렸다. 육신전을 지었을 때 그의 제자들이 장차 큰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였으나 그는 개의치 않으며 말하였다.
"내가 어찌 한 번 죽는 것을 두려워하여 끝내 충신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으리요."
그는 문장이 뛰어나 일찌감치 진사시험에 합격하였으나 문과시험에는 응시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늘 과거를 보라고 재촉하였는데도 그는 벼슬과 과거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는 항상 암말을 타고 다녔는데, 이 모습을 본 아이들과 부녀자들이 따라다니면서 비웃었다.
스물 다섯 살 때, 그는 당시의 임금인 성종에게 문종의 비이자 단종의 어머니인 소릉의 회복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런데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후 그때의 죄를 물었다. 하지만 이미 남효온은 세상을 떠난 뒤였다. 그런데도 연산군은 남효온의 시체를 파내어 양화도 나룻가 모래밭에 뿌렸다.
그의 부인과 사위들은 연산군을 두려워하여 감히 그의 시체를 거두지 못하였다. 결국 그의 시체는 땅에 다시 묻히지 못하고 강가에 버려졌다.
그의 아들 이름은 충서(忠恕)인데 정신병이 있었다. 연산군이 남효온의 시체를 부관참시하면서 아들도 함께 죽이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자 충서는 오히려 큰소리를 치면서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를 죽이러 왔던 관원이 이를 상부에 보고하였다.
"본래 미친 병이 들었으니 인간으로 칠 것도 못 됩니다."
그러나 연산군은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미친 자가 세상에 있으면 무엇하겠느냐? 반드시 죽여버려라."
결국 아들 충서마저 죽으니 그의 부인 조씨는 형장에서 시체를 수습해 3일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날씨가 추워 시체가 꽁꽁 얼어 있었다. 조씨는 밤낮으로 시체를 끌어안고 몸으로 녹여 염습한 다음 관에 넣어 장사지냈다고 한다.
남효온(南孝溫)
1454년(단종2) ~ 1492년(성종23).
본관은 의령(宜寧)이며 자는 백공(伯恭)이다. 호는 추강(秋岡). 행우(杏雨). 최락당(最樂堂). 벽사(碧沙) 등 여럿으로 불린다. 단종 복위 당시에는 어린 나이였으며, 주로 성종때의 활동이 전해지고 있다.
인물됨이 영욕을 초탈하고 지향이 고상하여 세상의 사물에 얽매이지 않았다. 1478년(성종9). 스물다섯의 나이로 장문의 상소를 올려 8개항을 건의하였는데 이 중 문종의 비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능인 소릉(昭陵)을 복위하라는 청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 내용이 불온한 것으로 여겨져 훈구파의 심한 반발을 샀다. 이 일로 조정의 미움을 받게 되고, 세상사람들도 그를 미친 선비로 지목하였다.
1480년 어머니의 뜻에 따라 마지못해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그뒤 다시 과거에 나가지 않았다. 벼슬을 단념하고 세상을 조소하면서 과격한 직언을 일삼았다. 특히 위험을 무릅쓰고 『육신전(六臣傳)』을 지어 사육신의 이름을 후세에 남겼다.
1504년 갑자사화 때는 소릉 복위을 상소한 것을 난신(亂臣)의 예로 규정하여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다. 저서로 『추강집』, 『추강냉화』,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등이 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