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을진은 조선의 개국공신인 남재(南在) 및 남은(南誾)의 숙부다. 고려 말 정치상황이 문란해지고 이성계 일파가 득세하자 그는 친구들에게 이별을 고하며 말했다.
"차마 내 눈으로 나라가 망하는 꼴을 보지 못하겠소. 차라리 시골로 돌아가 밭이나 갈면서 살겠소."
그는 주위 사람들과 이별한 후 곧장 양주 봉황산 아래로 내려가 은거하였다. 이윽고 조선이 건국된 후 이성계는 남재를 불러 말했다.
"그대의 숙부 남을진은 오래 전부터 내 친구요. 조정에서 인재를 구하고 있으니 어서 불러오도록 하시오."
이에 남재는 작은 아버지를 찾아가 임금의 뜻을 알렸다. 그러나 남을진은 고개를 내저으며 조카에게 말했다.
"비록 부자형제지간일지라도 서로 뜻이 같지는 않은 것이다. 너는 비록 새 임금의 으뜸가는 공신이 되었으나 나는 망국의 신하일 뿐이다."
그는 마침내 죽기로 결심하고 이부자리에 드러누운 채 조카의 청을 거절하였다. 결국 남재는 숙부의 뜻을 꺾지 못한 채 울면서 돌아갔다. 남재는 도성으로 돌아와 태조에게 이 사실을 고하였다. 그러자 곁에 있던 영의정 조준이 아뢰었다.
"남을진은 죽음을 각오한 것이니 그 지조를 빼앗기 어렵습니다. 원컨대 뜻대로 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여 태조는 조정에 불러들이는 것을 포기하고, 대신 그를 사천백에 봉하였다. 그러나 남을진은 그 봉작마저 끝내 받지 않으며 말했다.
"내가 산으로 들어가지 않아 이 같은 일이 벌어지는구나."
그는 자신이 세상에 남아 있는 한 조정의 부름이 계속될 것을 알고 산 속에 은거하기로 하였다. 마침내 그는 길게 머리를 풀고 통곡하면서 감악산으로 향했다. 그는 감악산에 동굴을 파고 그 속으로 들어가 여생을 마쳤다.
그는 굴 속에서 눈으로 해를 보지 않았고, 두 발로 굴 밖을 나온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남을진이 죽을 때까지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하였다.
오늘 날 우리주변에 있는 철새 정치인들은 되새겨 볼 일이다.
남을진(南乙珍)
생몰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본관은 의령이며 호는 병재(丙齋) 또는 사천(沙川)이다.
1368년(공민왕17) 현량과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거쳐 참지문하부사(參知門下府事)에 이르렀다. 정몽주, 길재 등과 교유하였으나 고려 말에 정치가 문란해지자 양주(楊州) 사천현(沙川縣) 봉황산(鳳凰山)에 은거하였다.
조선이 개국한 뒤 태조가 사천백(沙川伯)에 봉하고 회유하였으나 신하된 자로서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 하여 적성(積城)의 감악산(紺嶽山) 석굴에 들어가 은거하였는데, 그가 죽은 뒤 그 석굴을 남선굴(南仙窟)이라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