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한시협회 포천지회장 리 효종
김안국이 젊었을 때 가만히 방에 앉아 밤늦도록 글을 읽고 있었다. 그때 이웃에 사는 한 처녀가 그를 흠모하여 아무도 없는 달밤을 틈타 찾아왔다. 이에 김안국은 그 처녀를 꾸짖으며 말했다.
"네가 양반집 처녀로서 남자를 찾아왔으니 그 죄가 크다. 어서 종아리를 걷거라."
김안국이 매를 치자 처녀는 하는 수 없이 매를 맞고 되돌아갔다.
김안국은 성품에 꾸밈이 없고 한번 사람을 사귀면 지성으로 대하였다. 그는 한때 김안로(金安老)와 친하게 지냈는데, 훗날 김안로는 세도를 부리면서 세인들에게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늘 김안로에게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하루는 김안로가 그의 집을 찾아와 잠을 잤는데, 잠이 들 때까지도 충고를 멈추지 않았다. 그 말이 너무 심하였으므로 동생 김정국이 곁에 누워 있다가 형의 발을 툭툭 건드렸다. 그러자 김안국은 모르는 체하고 말했다.
"너는 아직 안 자고 있구나. 자꾸 내 다리를 치지 마라."
결국 김정국은 더 이상 형의 충고를 말리지 못했다.
그 후 김안로가 실각하고 결국엔 사형까지 당하고 말았다. 그러자 김안국은 동생에게 말했다.
"김안로의 간특함을 어찌 몰랐겠느냐? 하지만 우리 형제는 이미 그와 오랫동안 사귀었으니 그의 악한 것을 더 이상 말하지 말거라."
그러고는 김안로의 가족들에게 수시로 먹을 것을 보내주었다.
당시 성세창(成世昌)은 대단한 부자였는데 한때 김안국과 함께 독서당에 있었다. 그는 독서당에서 쓸 침구를 모두 비단으로 만들어 가져왔는데, 김안국은 가난할 뿐 아니라 검소하여 무명이불과 목침으로 생활하였다. 성세창이 그 모습을 보고는 몹시 부끄러워하며 집에 돌아가 부인에게 말했다.
ꡒ김안국이 예전에 내 잘못을 비웃어주었다면 내 어찌 오늘같이 부끄러운 일을 당했겠소.ꡓ
그러고는 침구를 소박하게 바꾸어 가지고 왔다.
김안국이 한양에 있을 때 조그마한 집을 지었는데, 어느 날 그는 기와공을 불러 그 비용을 계산하고 있었다. 그때 어떤 재상이 그의 집을 방문하였다. 하지만 김안국은 재상에게 인사 몇 마디만 건네고 곧 기와공과 토목비, 운반비, 장인의 수공비를 열심히 따지고 물었다. 재상은 그 모습을 보다가 화를 내며 돌아가 버렸다. 그러자 친척 한 사람이 혀를 차며 말했다.
"재상이 찾아왔는데 이야기도 나누지 않고 저렇게 돌려보내면 어찌합니까?"
그러자 김안국은 태연하게 말했다.
"내가 그렇게 한 것은 이 나라에 통용되는 규범을 위해서요. 만약 김안국이 일개 기와공에게 값을 속는다면 아무 힘도 없는 과부와 가난한 선비들은 앞으로 어떻게 기와를 사겠소? 내가 마침 일이 있을 때 재상이 찾아왔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오."
김안국과 김정국이 각각 이천과 고양에서 살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동생 정국이 형을 찾아 갔는데 마을 사람들이 콩을 삶아오고, 혹은 오이를 따와서 형에게 바치는 것이었다. 더구나 형은 그것을 모두 받은 후 일일이 장부에다 기록하고 있었다. 김정국이 얼굴을 찌푸리며 형에게 물었다.
"형님은 어찌하시려고 그런 것을 받아들이시며, 또 장부에다 일일이 기록하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그러자 김안국은 웃으며 대답했다.
"동네 사람들이 정성껏 가져오는 것을 내 어찌 물리칠 수 있으며, 또 그것을 기록해두지 않으면 언젠가 반드시 잊어버릴 것이니 남의 은혜에 어떻게 보답하겠는가?"
형제는 시골에 살면서 늘 검소한 생활을 하였다. 동생 정국은 나물과 조밥으로 생계를 이어갔고, 형 안국은 농장을 마련하여 양곡을 쌓아두고 홀로 된 누이와 그 자식들까지 데려다 길렀다고 한다.
김안국(金安國) 1478년(성종9) ~ 1543년(중종38).
본관은 의성이며 자는 국경(國卿). 호는 모재(慕齋)이다. 조광조와 함께 김굉필 밑에서 수학했는데 도학에 통달하여 사림파의 선도자가 되었다.
1501년(연산군7) 생진과에 합격. 1503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되었으며, 1507년(중종2)에는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했고 지평. 장령. 예조참의. 대사간. 공조판서 등을 지냈다.
1517년 경상도 관찰사로 파견되고, 1519년에 다시 도성으로 올라와 참찬이 되었다. 그러나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와 사람들이 죽음을 당할 때, 겨우 화를 면하고 파직되어 경기도 이천으로 내려가 후진들을 가르치며 지냈다. 1532년에 다시 등용되어 예조판서. 대사헌. 병조판서. 좌참찬. 대제학. 찬성. 판중추부사 등을 지냈다.
성리학적 이념에 의한 통치의 강화에 힘쓰고, 시문으로도 명성이 있었다. 저서로 『모재집』 『모재가훈(慕齋家訓)』 『동몽선습(동몽선습)』등이 있고,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