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겨찾기+  날짜 : 2026-10-30 오후 07:36:52 회원가입기사쓰기전체기사보기원격
뉴스 > 문화

[韓國의선비정신 = 63] 선비가 없으니 이 나라의 도는 사라졌구나!

한국한시협회 포천지회장 리효종
포천신문 기자 / jun28258@gmail.com입력 : 2007년 05월 02일

서경덕은 송도 사람으로, 여러 대에 이르러 가문이 보잘 것 없고 집도 가난하였다. 일찍이 『서경(書經)』을 읽다가 "1년은 366일"이라는 주석을 보고 거듭 생각했으나 쉽게 풀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어떤 늙은 선비가 경서에 밝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가 가르침을 청했다. 그러나 늙은 선비는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나도 그 대목에 이르러 수많은 사람들에게 물어보았으나 늙은 스승이나 나이 많은 선비라 하더라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나 또한 배우지 못하였다."


서경덕은 집으로 돌아와 탄식하며 말했다.


"세상에 통달한 선비가 없으니 이 나라의 도(道)는 사라졌구나!"


서경덕은 그 대목을 뜯어 벽에 붙여놓고 침식까지 잊으며 15일 동안 탐구하여 마침내 그것을 터득하게 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열일곱이었다.


이후 그는 혼자 독학하여 명성이 날로 빛났는데 그를 추앙하여 배우러 찾아오는 사람들이 비록 천 리를 떨어져 있다 하더라도 멀게 여기지 않았다. 당대의 명망 있는 선비들이 대부분 그를 만나보고 가르침을 받을 정도였다.


어느 날, 서경덕의 제자 이구(李球)가 스승을 찾아갔다가 만나지 못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서경덕은 그가 만월대에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갔다. 그때 이구는 율무와 질경이로 끓인 죽을 드렸는데, 서경덕은 죽을 맛보고 나서 말했다.


ꡒ내가 평생 마른밥을 먹을 때가 드물었는데, 이 죽은 바로 내게 어울리는 것이다.ꡓ


그러고는 일어나 춤을 추며 이구에게 노래를 부르라 하였다. 이구는 그때 선생이 춤추는 뜻을 몰랐으나 늘그막에 이르러서야 그 뜻을 알아차렸다고 한다.


서경덕은 천마산 계곡의 화담이라는 곳에 초가를 짓고 살았다. 제자 한 사람이 산에 두 개의 동굴을 파주자 그 바위굴에서 산양을 치기도 하였으며, 대개는 찾아오는 선비들과 학문을 토론하였다.


집이 가난하여 여러 날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할 때도 많았다. 어머니의 뜻에 따라 생원시에 응시해 합격하였으나, 그 뒤로 다시는 과거를 보지 않았다.


제자 강문우(姜文佑)가 어느 날 쌀을 지고 서경덕을 찾아왔다. 두 사람은 방안에 앉아 한낮이 되도록 학문을 논하였다. 하지만 서경덕은 전혀 피곤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한낮이 되자 강문우는 부엌으로 가서 밥 짓는 사람을 찾았다. 밥 짓는 사람이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제부터 양식이 떨어져 아직 아궁이에 불을 피우지 못했습니다."


황해도 방백(方伯)으로 서경덕과는 잘 아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선생을 초청하여 대접하기를 원하자 서경덕은 그 집을 찾아가 하루를 머물렀다. 그가 떠날 때 방백이 많은 노자와 붓, 종이를 선물했으나 서경덕은 모두 받지 않고 쌀 닷 되만 받아 돌아왔다.


대제학 김안국의 천거로 서경덕은 중종 말년 참봉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부임하지 않은 채 평생 베옷을 입고 학문을 연구했다.


그때 송도에 황씨 성을 가진 진랑이라는 기생이 있었는데, 진랑은 성품이 쾌활하여 마치 남자와 같았으며, 거문고를 잘 타고 노래를 잘하여 사람들이 "황진이"라고 불렀다.


진랑은 서경덕이 도를 이루었다는 말을 듣고는 한번 시험해보고 싶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허리에 실끈을 매고 거문고와 술을 든 채 서경덕이 은거하는 화담 계곡을 찾아갔다. 그녀는 서경덕을 보자 대뜸 이렇게 말했다.


"제가 듣기로 남자는 관직에 나가 가죽띠를 매고, 여자는 좋은 남편을 만나 집 안에서 실끈을 맨다고 합니다. 저 역시 학문을 조금 배웠는데 감히 실끈을 매고 와서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이에 서경덕은 그녀를 제자로 받아들였다. 이윽고 밤이 되자 진랑은 거문고와 술을 들고 서경덕을 찾아와 유혹하였다. 여러 날을 유혹했으나 서경덕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서경덕의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확인한 진랑이 말했다.


"지족선사(知足禪師)는 30년 동안 벽을 쳐다보고 앉아 공부했어도 나에게 무너졌지만, 오직 화담 선생은 여러 해 동안 가까이 지냈으나 무너지지 않았으니 이는 진실로 성인(聖人)이로다."


그러고는 화담에게 말하였다.


"송도에 삼절(三絶)이 있습니다."


"무엇이 삼절인고?"


"박연폭포와 선생과 저입니다."


허엽(許曄)이 늘 서경덕을 존경했다.


어느 날 허엽이 서경덕을 만나기 위해 화담 계곡에 갔다. 그때 서경덕은 거문고를 타면서 시를 읊고 있었는데, 허엽이 저녁밥을 지으려 하자 넌지시 말했다.


"나도 밥을 먹지 않았으니 내 먹을 것도 함께 짓게."


허엽이 부엌에 들어가보니 이끼가 가득 끼어 있었다. 허엽이 깜짝 놀라 서경덕에게 물었다.


"아니, 솥 안에 왜 이끼가 끼어 있습니까?"


"길이 막혀 집사람이 엿새째 오지 못했네. 그동안 밥을 지을 쌀이 없어 아궁이에 불을 지피지 않았는데, 벌써 이끼가 끼었나 보군."


허엽이 안타까이 여기면서 선생의 얼굴을 바라보니 조금도 굶주린 빛이 보이지 않았다.


병이 깊어 마침내 죽을 날이 다가오자 서경덕은 자신을 돌봐주던 사람을 불렀다.


"내가 허약하여 움직일 수 없으니 나를 업어 계곡에 데려다주게."


이윽고 물가에 도착하자 서경덕은 목욕재계한 후 조용히 죽음을 맞았다. 평생 벼슬에 나가지 않았던 그의 비석에는 "생원서모지묘(生員徐某之墓)"라고 썼다.




서경덕(徐敬德)


1489년(성종20) ~ 1546년(명종1).


본관은 당성(唐城)이며 자는 가구(可久). 호는 화담(花潭) 또는 복재(復齋)이다. 그는 송도의 화담(花潭)에 은거하며 살았는데 사람들이 마을 이름을 따서 화담이라 불렀다.


1531년(중종26) 어머니의 요청으로 생원시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성리학 연구에 더욱 힘썼다. 1544년에는 김안국등이 후릉참봉(厚陵參奉)에 추천하여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특히 예학에 밝았으며 황진이(黃眞伊), 박연폭포(朴淵瀑布)와 더불어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불린다.


저서로 『화담집』이 있으며,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포천신문 기자 / jun28258@gmail.com입력 : 2007년 05월 02일
- Copyrights ⓒ포천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트위터페이스북밴드카카오스토리
이름 비밀번호
개일정보 유출, 권리침해, 욕설 및 특정지역 정치적 견해를 비하하는 내용을 게시할 겨우 이용약관 및 관련 법률에 의해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PBS 포천방송 TV
경기도
생활상식
가장 많이 본 뉴스
정보 커뮤니티
상호: 포천신문 / 주소: 경기 포천시 해룡로 130-38 (동교동)
발행인·편집인 : 김현영, 편집인 강신옥 / mail: ipcs21@hanmail.net / Tel: 031-542-1506~7 / Fax : 031-542-1115
정기간행물 등록번호 : 경기 아50080 / 등록일 : 2009년 6월 22일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현영
Copyright ⓒ 포천신문 All Rights Reserved. 본지는 신문 윤리강령 및 그 실천요강을 준수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