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천한시사 대표 리 효종
송인수는 중종때 문과에 합격하고 정9품에 해당하는 홍문관 정자로 들어갔다. 당시는 기묘사화를 일으켰던 훈구파와 왕실의 외척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을 때였다. 따라서 선비들의 사기는 크게 떨어지고, 바른 말을 아뢰어야 할 언관(言官)들 조차 권력자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송인수는 곧은 절개로 끝까지 직언을 멈추지 않았다.
"임금이 자신의 허물을 듣기 싫어하면 마침내 언관을 죽이게 되고, 결국 나라도 망하게 됩니다. 언관을 죽이고 망하지 않은 나라가 없으니 말할 가치조차 없습니다."
김안로가 실각한 후 송인수는 유배지에서 돌아와 대사헌에 복귀하였다. 하지만 조정은 다시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으로 나뉘어 첨예하게 대립했다. 송인수는 이들을 비판하다 전라도 관찰사로 쫓겨 갔다가 인종이 즉위한 후 다시 대사헌에 올랐다.
그 무렵 윤원형이 형조참판이 되자 송인수는 여러 날 동안 이를 비판하였다. 그러나 윤원형은 곧바로 품계를 뛰어넘어 공조참판에 임명되었다. 송인수는 이것이 부당한 인사라며 두 달 동안이나 임금에게 강력히 아뢰었다.
송인수가 뜻을 굽히지 않고 계속 주장하자 주위의 친구는 물론 매부인 성제원까지 윤원형의 세도를 두려워해 그만둘 것을 권유했다.
"공조참판이 무슨 대단한 자리라고 그렇게 고집을 부리나? 윤원형이 세도를 부리고 있으니 자네만 해를 입게 될 것일세."
그러자 송인수는 이렇게 대답했다.
"어찌 윤원형 같은 인간을 재상의 반열에 둘 수 있겠습니까!"
얼마 후 을사사화가 일어나 그는 또 귀양을 떠나게 되었다.
인종이 즉위 8개월만에 승하하고 명종이 즉위하자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계속하였다. 점차 정사가 문란해지자 양재역에 이런 벽서가 붙었다.
"계집 임금이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가 밑에서 권세를 희롱하니 나라가 망하는 것을 곧 보게 될 것이다. 이 어찌 한심한 일이지 않은가?"
벽서사건이 일어나자 정언각(鄭彦慤)이 이기를 찾아가 모함하였다.
"송인수가 오랫동안 대사성으로 있으면서 선비들에게 부박한 습성을 길러 오늘의 변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를 죽이지 않으면 뒷날의 폐단을 막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그를 중형에 처하십시오."
이에 문정왕후는 명종을 시켜 송인수에게 사약을 내리라고 부추겼다.
어명이 도착하던 날은 마침 생일 하루 전이었다. 송인수는 이미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 후 어느 날 누군가 문을 두드리며 큰 소리로 송인수의 이름을 불러댔다. 하인들이 나가보니 의금부 도사가 군사를 이끌고 대문 앞에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아내가 뒤로 넘어지며 허겁지겁 뛰어가 송인수에게 알렸다. 그러나 송인수는 태연한 표정으로 말하였다.
"사형 명령이 아니고서야 이렇게 급할 수야 없겠지."
송인수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면서 밖으로 나왔다. 아내가 그의 허리를 부여잡고 울기 시작했으나 그는 허리띠를 풀어버리고 나가며 말했다.
"곧 이 띠를 가지고 나오시오. 어명이 내려왔으니 조금이라도 늦출 수 없소."
이윽고 송인수는 마당에 무릎을 꿇고 의금부 도사에게 말하였다.
"원컨대 어명을 듣고 나서 죽기를 바라오."
도사가 임금의 전지(傳旨)를 보이자 그는 단박에 읽어 내렸다. 전지에는 자신의 죄가 조목조목 적혀 있었다. 전지를 읽은 송인수가 고개를 쳐들고 말하였다.
"간신들의 모함이요!"
그런 다음 송인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천천히 일어나며 말했다.
"떠나는 마당에 이런 몰골로 갈 수는 없지 않겠소. 목욕재계하고 나올 터이니 잠시만 기다려주시오."
송인수는 곧 깨끗이 몸을 씻은 후 손톱과 발톱을 깎았다.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다시 꿇어앉아 주위 사람에게 종이와 붓을 청하였다. 사촌동생 송기수가 붓과 종이를 갖다주자 그는 송기수에게 유언 한마디를 남겼다.
"하늘과 땅이 내 마음을 알아주리라."
송인수는 다시 어린 아들에게 유서를 써주었다.
"부끄러운 마음을 지니고 사는 것은 부끄러움 없이 죽는 것만 못하니라. 부디 책을 읽지 말라."
어린 아들이 유서를 받아들자 그는 다시 그것을 빼앗아 고쳐 썼다.
"글은 안 읽을 수 없고, 과거만 보지 말라."
의금부 도사가 사약을 건네자 그는 북쪽을 향해 두 번 절하고 사약을 받아들었다.
"신의 죄가 만 번 죽어 마땅한데 이렇게 스스로 죽게 만드시니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그는 또 조상들의 사당이 있는 쪽을 향해 절하고 나서 말하였다.
"임금을 잘못 섬겨 오늘에 이르렀으니 장차 무슨 면목으로 황천에서 뵈오리까."
마침내 그는 태연히 두 손으로 사약을 들었다. 그때 송인수의 나이 49세였다.
송인수(宋麟壽)
1499년(연산군5) ~ 1547년(명종2).
본관은 은진(恩津)이며 자는 미수. 호는 규암(圭菴)이다. 1521년(중종16) 별시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正字)가 되었다. 그후 박사로 승진하고 사간원, 사헌부 등에 머물며 김안로의 재집권을 막으려다가 오히려 1534년 제주목사로 좌천되었다. 이때 병을 핑계로 부임하지 않아 다시 사천으로 유배되었다.
1537년 김안로 일파가 몰락하자 다시 조정에 복귀해 성균관 대사성으로 후학에게 성리학을 강론하였다. 대사헌이 되었으나 다시 윤원형과 이기의 미움을 받아 1543년 전라도 관찰사로 좌천되었다. 이 무렵 남평현감 유희춘, 무장현감 백인걸 등과 뜻이 맞아 학문을 토론하였다.
인종이 즉위하자 다시 대사헌이 되어 윤원형을 탄핵하였는데, 15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탄핵을 받고 청주에 은거해 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저서로 『규암집』이 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