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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의 선비정신 58 ]대신이 뇌물을 밝히면 작은 벼슬아치들이 무엇을 본받겠습니까?


포천신문 기자 / jun28258@gmail.com입력 : 2007년 03월 12일

한국한시협회 포천지회장  리효종

선조가 경연에 납시었을 때 노수신과 수찬 김성일이 함께 입시하였다. 선조가 신하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요즘 선비들이 도무지 염치라곤 없어졌으니 어째서 그러한가?"


김성일이 곁에 있다가 아뢰었다.


"대신이 뇌물 받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니 작은 벼슬아치들이 무엇을 본받겠습니까?"


선조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우의정 노수신이 남에게 담비가죽으로 만든 장옷을 뇌물로 받았습니다. 이는 벼슬을 팔아 뇌물을 받은 것이니 어찌 정승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곁에 있던 노수신은 김성일의 말이 끝나자 식은땀을 흘리며 아뢰었다.


"수찬의 말이 옳습니다. 신의 어머니가 늙고 병이 많아 겨울만 되면 추위를 참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변방에 장수로 있는 친척에게 담비가죽으로 만든 장옷을 부탁하여 늙은 어미에게 주었습니다."


그러자 곁에 있던 박순이 노수신을 옹호하며 말했다.


"노수신은 청렴한 사람이니 단연코 그런 일이 없을 것입니다. 노수신이 어머니를 극진히 섬기는 것으로 효성이 자자하니 어머니의 말을 감히 어기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이 일은 아마도 수신의 아우 극신(克愼)이 저지른 일일 것입니다."


두 사람의 말을 듣고 난 선조가 말했다.


"과인의 생각도 그러하오. 우의정이 어찌 재물을 좋아하는 사람이겠는가?"


그러자 김성일이 다시 아뢰었다.


"우의정이 어머니를 섬길 때는 마땅히 기쁜 얼굴로 대해야 하지만, 어찌 나라의 벼슬을 팔아 어머니를 기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노수신은 마침내 임금에게 절하고 사죄하였다. 선조는 두 사람을 모두 칭찬하며 말했다.


"대간이 곧은 말을 하고 대신이 스스로 자백하였으니 모두 체면을 살렸소. 두 사람 모두 가상하도다."


경연이 끝나자 노수신이 밖으로 물러 나와 김성일에게 말했다.


"그대를 보니 옛 성인의 도(道)를 다시 보는 것 같네."


노수신은 평소 김성일과 친하게 지냈는데 이 일이 있은 후로 서로를 더욱 소중하게 여겼다.


하루는 선조가 신하들에게 물었다.


"나는 옛날의 어느 임금에 비할 수 있는가?"


정이주(鄭以周)가 답하였다.


"마땅히 요 임금과 순 임금에 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선조가 다시 김성일에게  묻자 그가 답하였다.


"요순 같은 임금이 될 수도 있고, 걸주(桀紂)가 될 수도 있습니다."


선조가 깜짝 놀라 물었다.


"요순과 걸주가 같은가?"


"성상께서는 본성이 고명하시니 요순같은 임금이 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성인인 체하시어 신하들의 올곧은 말을 거절하시는 병폐가 있습니다. 이러한 병폐로 인하여 바로 걸주가 망했습니다."


임금이 노한 빛으로 안절부절못하니 신하들이 매우 두려워하였다. 그 때 유성룡이 앞으로 나서며 아뢰었다.


"두 사람의 말이 다 옳습니다. 요순에 비유한 것은 임금을 인도하기 위한 것이고, 걸주에 비유한 것은 임금을 조심시키려는 뜻입니다."


그 말을 들은 선조는 노한 빛을 거두고 술을 하사한 뒤 자리를 파하였다.




김성일(金誠一)


1538년(중종33)~1593년(선조26)


본관은 의성이며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峰)이다. 1556년(명종11) 아우 복일(復一)과 함께 이황을 찾아가 학문을 익혔으며, 1564년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다. 그후 다시 도산으로 돌아와 이황에게서 수학하였다. 1568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여러 요직을 거쳐 1584년 나주목사가 되었다.


1590년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파견되었다가 이듬해 돌아와 일본이 침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고를 올렸다. 그후 대사성, 부제학 등을 지냈으나 1592년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재직하던 중 임진왜란을 맞았다. 이때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의병활동을 고무하고, 그해 8월 경상좌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가 곧 우도관찰사로 다시 돌아와 의병의 규합과 군량미 확보에 전념하였다. 1593년 경상우도순찰사를 겸하여 도내 각 고을의 전투를 독려하다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 『학봉집』이 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포천신문 기자 / jun28258@gmail.com입력 : 2007년 03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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