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병철(柳秉喆)」대감(순조 7년,1807년~고종 35년 1899년 )은 소흘읍 고모리 향적산 아래에서 태어났던 명문가의 후손으로 학자이며 행실이 바르고 학식이 고명(高明)하여 많은 제자를 두었다.
포천의 문화류씨 명문가 출신으로 자는 계소(季昭) 호는 향하(香下)였으며 시령부원군 영의정 류전의 10대 손이다.
류씨 문중의 대학자 용서 기일(龍西 基一)의 둘째 아들이다.
학행(學行)으로 금부도사(禁府都事)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을 제수 받고 고종 26년(1889년) 조대비(趙大妃)의 망구친경(望九親慶 : 여든 한 살의 나이로 나이 90세를 바라보는 경사스런 잔치를 축하함)으로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가 제수 되는 영광을 입었다.
영광은 이에 끝이지 않았다. 선조조 영의정 시녕부원군 유전의 갑일(300년 甲日)이 되여 공신의 10대 적장손(嫡長孫)으로서 유병철(柳秉喆)대감에게는 문녕군(文寧君)의 습봉을 받는 영광을 받게 되었다.(세습공신군호)
우리가 류병철 대감을 특별히 기억해야 할 바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1894년 고종 31년 나라가 혼란하고 나라의 재정이 궁핍하던 시절이고 왜놈들이 국정에 간섭하자 녹봉(祿俸 : 나라에서 주는 급여(지금의 봉급))을 받지 아니하고 세의(歲儀 : 연봉(年俸)를 받지 아니하는 양반의 도리와 벼슬자리에 있는 자의 도리와 책임을 지고자 하였던 참 선비였으며 군자였다.
다시 말해서 국가에서 원로 신하에게 내리는 세비(歲費)를 받지 않은 것은 왜놈들의 변란을 보고도 죽음으로 나라를 지키지 못한 귀족이나 양반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 부끄럽고 송구한 임금이나 백성에 대한 책임의식의 발로였다고 볼 수 있다. 굳건한 절개의 발로라고 말하는 선비도 있다.
요즈음 세태를 보라. 나라의 예산이나 재정을 축내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철면피들이 판치는 세상이 아닌가?
내 고향의 명문가 문화 류씨 문중의 류병철 대감의 행적을 후세 교육 자료로 가르침을 주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