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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만의 왕릉 이야기 ⑪ - 목릉] 선조와 의인왕후·인목왕후


포천신문 기자 / ipcs21@hanmail.net입력 : 2026년 10월 12일
 
< 강경만/ 공인노무사 >
 
1. 목릉답사를 나서며 (답사일 : 2026. 10. 10)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은 가을로 가득차 있습니다. 만산홍엽을 기대하며 다시 왕릉답사에 나섰다. 말하지 않는 것들과의 대화, 유네스코 세계유산 조선 왕릉, 작은 걸음 큰 울림, 왕릉답사. 이번 왕릉답사는 구리 동구릉 목릉입니다.

2. 선조, 그는 누구인가?
선조는 연산군을 쿠데타로 몰아내고 왕이 된 성종의 2남인 중종의 손자이다. 선조는 중종과 후궁 창빈 안씨의 소생인 덕흥군 이초의 3남 하성군 이공으로 처음부터 왕이 될 수가 없는 방계 혈통 서손이었다. 그러나 중종의 두 아들 인종과 명종이 후사 없이 죽자 16세의 하성군 이공이 조선 14대 왕으로 등극하는데 그가 선조이다. 조선시대 처음으로 서손이 왕이 된 운 좋은 케이스이다.

선조는 친정 후 가장 먼저 과거제를 개편하여 현량과를 다시 실시 하고, 성리학적 왕도정치를 구현하기 위해 많은 사림세력을 등용하였다. 조광조 등 사림세력은 중종대 기묘사화로 희생양이 되어 정계에서 완전히 축출, 사라지고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 인고의 와신상담 세월을 보냈는데, 드디어 선조대에 정계로 화려하게 복귀하여 김효원과 심의겸의 논쟁에서 보듯 붕당정치로 빠른 속도로 세력 팽창을 도모하였다.

3. 7년 임진왜란(조일전쟁)
조선은 1592년 개국 이래로 크고 작은 외침은 있었지만, 국가적 재앙 없이 순탄하게 문치숭상의 태평성대를 맞이 하였다. 그러나 개국 200년이 지난, 1592년 임진년에 큰 국난이 발생하는데 당시 지배세력들은 당파싸움으로 왜구의 외침대비에 너무나 소흘하였다.

그 단적인 예가 동인 황윤길과 서인 김성일이 왜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통신사>로 갔다가 선조에게 상이한 보고를 하였고, 선조는 당시 집권세력인 동인의 건의를 받아들여 전란을 대비하지 않는 쪽으로 결론을 낸다. 백성의 어버이인 왕이시어! 왕이라면 유비무환은 했어야죠?

그에 반해 왜는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랫동안 지속 되던 전국시대를 평정하고 나라를 하나로 통일하여, 군부, 상인, 신흥세력의 힘을 외부로 돌리고 국민을 하나로 결집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전쟁을 일으키는데 그것이 치욕적인 임진왜란, 일명 7년간의 조.일전쟁이다. 이것을 역사는 뜬금없이 임진년에 일어난 왜란이 라서 '임진왜란'이라 부르고 있다.

마침내 1952년 4월 13일 오후, 왜의 30만 병력 중 20만 병력이 총동원 되어 모두 9개의 부대로 편성하여 조선의 한양을 향해 질풍노도처럼 밀고 올라온다. 20만 대군의 침입을 받은 조선은 불과 20일 만에 수도 한양을 빼앗기고 이후 6월에는 평양을 또 다시 내주어 선조는 전략상 의주성에 피난한다.

여차하면 명나라로 몸을 의탁, 망명하려는 계획이었겠지만, 허둥지둥 갈피를 못잡는 선조와 지배층은 한마디로 호남지역과 평안도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전 지역을 일본군의 손아귀에 점령 당하였다. 어떡해죠?

그러나 훗날 대한민국 국민의 존경하는 인물 순위 1.2위를 다투는 성웅 이순신 장군의 덕택으로 전세가 조금씩 역전되고, 명나라 원군으로 역전의 계기를 마련하고 왜의 풍신수길이 위중하다는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 통한의 '화의'에 성립하게 된다. 이를 영화화 한 최민식 주연의 "명량" 이 국민의 눈씨울을 적시며 천만관객 동원에 성공한다.

결국, 7년의 임진왜란이 조선, 명, 왜(일본)에 끼친 영향은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가장 안타까운 것은 임란 전후 이름없는 들풀과 같은 백성의 생활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처참해졌고, 왕조실록 등 문화재 소실이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애이불비하게도 역사는 선조시대를 '목릉성세'라고 부른다. 이순신, 정문부 장군과 유성룡, 이이, 이항복, 이덕형 등 문신 등 영웅호걸들이 많이 나온 성대였다는 것이다.

어쨌든 엉웅은 난세에 난다고 한다. 그 중에 한 분은 서울 건천동에서 태어나 아산 현충사에 모셔진 성웅 이순신과 함경도에서 의병을 이끌며 백성과 고장을 지켜낸 충의공 정문부 장군, 그리고 "역사는 기록이다"를 몸소 실천한 서애 류성용, 또 한 부류가 선조시대의 위대한 석학, 오늘날 한국돈 지폐 5만원권의 표지 모델, 사임당 신씨와 아들 율곡 이이, 관동별곡을 지어 불멸의 글을 남긴 시인 송강 정철 그리고 일제하 암흑기 독립운동가 이회영 이시영 선생의 선조 이신 호종공신 백사 이항복, 오성과 한음의 이덕형 등이다.

4. 목릉(穆陵)의 표지석
목릉은 조선의 국왕 선조와 선조의 비 의인왕후 박씨 그리고 계비 인목왕후(仁穆王后) 김씨의 능이다. 선조는 조선 제14대 국왕으로, 중종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덕흥 대원군 이초다. 어렸을 때부터 명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명종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국왕으로 즉위했다. 훈구파 대신 사림을 우대하는 정치를 펴서 여러 이름난 인재들이 대거 조정에 진출하도록 했다. 이때를 목릉성세라고 부른다.

의인왕후 박씨는 반남 박씨 박응순의 딸로 후사를 생산하지 못하는 외롭게 생활하다 임란 중에 사망하였다. 인목왕후의 본관은 연안이며, 연흥부원군 김제남의 딸이다. 의인왕후가 세상을 떠난 후 1602(선조 35) 왕비에 책봉됐으며, 1606년 적자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낳았다. 당시 세자로 있었던 광해군은 서자 출신이었기 때문에 영창대군의 존재는 광해군에게는 정통성에 있어 늘 위협이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영창대군을 살해하고 인목왕후를 딸과 함께 경운궁(서궁(西宮))에 유폐시켰는데, 이는 인조반정의 직접적인 빌미가 되었다. 결국 1623년 발생한 인조반정 당시 인목왕후는 광해군의 폐위와 인조의 즉위를 승인하기도 했다. ‘인목대비’라는 영화나 드라마에 많이 등장했던 인물이다. 목릉의 정자각은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다포양식의 건물로 보물로 지정되었다.

5. 사직단 옆 도정궁
사직단 옆 도정궁은 선조의 아버지 덕흥군 이초의 집으로 조선 14대 왕 선조의 잠저다. 훗날 선조의 10대 손인 운경 이재형 국회의장이 거주하다 사망후 운경재단에서 관리하고 있다.

6. 왕릉답사를 마치며
조선왕 중 최악의 평가를 받지만 왕릉은 명당터에 자리잡은 목릉,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역사는 당시를 목릉성세라고 부른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일갈한 E.H 카아의 명언을 되새기며 기억해야 한다. 어쨌든 이곳의 풍수좋은 정기를 받아 나라의 미래를 개척하는 수많은 영웅호걸이 나타나 한국의 마중물 되기를 학수고대해 본다. 오늘도 아낌없는 행복을 선물합니다. 감사합니다.

2026. 10. 10.

강경만/ (한솔노무사사무소 대표/포천신문 자문위원회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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