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주인을 알아보는데 나는 주인을 잃었구나."
라고 하면서 나라 잃은 설움을 한탄하고 노새에게 큰절을 하였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노새가 주인을 보면 반가와 하는 것을 보고 이청열님이 망국의 설움의 한 마디를 한 대목이다.
헌종 13년 (1847년) 군내면에서 태어나 1940년 타계하신 이청열님은 상성북리가 고향이며 명문가 고성 이씨 문중의 인물이다. 음보(蔭補 : 과거가 아닌 조상의 음사(蔭仕)로 벼슬길에 나가 받은 보직)로 별군직에 고종 8년 나아갔으나 1873년(고종 10년) 친시(親試 : 임금이 친히 임하여 보는 과거와 같은 성격의 시험)에 급제하여 「훈련원 주부」「중추부첨지」「사복시정」「함안군수」를 지냈는데 함안군수 시절 수의사(繡衣使 : 암행어사 같은 성격의 시찰관)의 추천으로 선정을 베푼 공을 인정 받았다. (수의사→이정래 : 李正來)
고종 19년(1882년)에는 청산진 첨사로 있을 때 큰 공을 세워 「만인산 (萬人傘)」을 하사받았다.(백성들 여러명이 공로를 칭송하는 글을 늘어뜨린 우산)
청산진을 떠난 뒤에는「거사비(去思碑)」를 세웠다. (백성들이 전임 사도의 공을 생각하여 세운 선정 공로비)
고종 29년 (1892년)에 방어사가 되었으며 고종 31년(1894년)에는 「선유사(宣諭使) : 진압군 사령관」으로 동학군을 진압하였다. 광무 1년(1894년)에 중추원 의관이 되었으나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귀향하여 서당을 세워 인재양성(人材養成)에 힘썼다. 성균관에서도 큰 업적을 남겼다 한다.
이청열님의 제자로는「서석구(徐錫九)」님을 들 수 있는데 서석구님은 고종34년(1897년)」군내면 울뫼 출생으로 이청열님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이청열님의 제자였던「서석구」님은 이청열님에게서 천문과 주역을 전수 받았으며 평생 공자상을 모시고 초하루 그믐에 분향하였으며 조석(朝夕)으로 주역을 암송하였다 한다. 또한 죽는 날까지 머리를 깎지 않았으며 유학 이외에는 사도(邪道)라는 신념(信念)이 강한 분이었다 한다.
한 때 성균관에서 김창숙(金昌淑)옹이 중국의 105현인을 철폐할 것을 유림에 의결을 통해 크게 혁신운동을 편 일이 있다. 그러나 서석구님은 1960년 전국 유림대회를 열어 이를 다시 설립하기 위한 위원장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86세를 일기로 타계하시기까지 한의학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서석구 선생의 공자님 숭배 사상이나 유학운동은 남다른 데가 있어 연구할만한 가치가 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변절과 배신을 밥 먹듯 하는 요즈음 세태에 비추어 볼 때 이청열님이나 서석구님 같은 인물이 내 고향 포천에서 태어나 청도(淸道)를 걷다가 가셨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가 크다 아니 할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