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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선비정신 53]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포천신문 기자 / jun28258@gmail.com입력 : 2007년 01월 22일

한국한시협회 포천지회장  리 효종

길재가 어렸을 때 아버지 원진이 보성대판(寶城大判)에 임명되었다. 그러자 어머니 임씨는 부임하는 남편을 따라가면서 길재를 외가에 맡겼다. 어린 나이에 외가에 맡겨진 길재는 항상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렸는데, 하루는 시냇가에서 놀면서 노래를 지어 불렀다.




자라야, 자라야.


너도 어머니를 잃었느냐


나 또한 어머니를 잃었단다


너를 삶아먹을 줄 알지만


나와 같이 너도 어머니를 잃었으니


차마 너를 놓아줄 수밖에 없구나.




그는 어렸을 때 형편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책 상자를 등에 짊어지고 스승을 찾아 다녔다. 열 살 때 절에 들어가 글을 배우고, 열여덟 살 때는 정몽주 문하에서 공부하여 우왕 12년(1386년) 과거에 급제하였다.


아버지 원진은 개경에서 벼슬을 하면서 노씨라는 여자에게 새 장가를 들었다. 이에 길재의 어머니가 날마다 아버지를 원망하였다. 어머니의 원망을 들은 길재가 조용히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고 말했다.


ꡒ비록 옳지 않은 일을 한다 해도 아내가 지아비에 대하여, 그리고 자식이 부모에 대하여 그 행동이 그르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인륜에 벗어나는 것은 비록 성인이라도 어쩔 수 없습니다. 다만 스스로 옳게 처신할 뿐입니다.ꡓ


아버지는 어머니를 멀리하고 새 부인과 살고 있었다. 길재는 몹시 마음이 상했지만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어느 날, 길재는 짐을 꾸리고는 어머니에게 하직인사를 올리며 말했다.


ꡒ아버님께 오랫동안 문안드리지 못했으니 자식의 도리가 아닙니다.ꡓ


그러고는 스승 박분을 따라 아버지가 있는 개경으로 향했다. 새 어머니 노씨는 길재를 험하게  대했으나 그는 친어머니를 대하듯 극진히 효성을 다하였다. 마침내 노씨도 그의 효성에 감동하여 친자식처럼 대하였다.


공양왕 2년(1390)에 길재는 고려가 장차 망할 것을 알고 어머니가 늙었다는 이유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향했다. 그 뒤 2년 만에 고려 왕조는 멸망했다.


처음 이방원(조선조 태종)이 평민이었을 때 길재는 그와 같은 마을에 살면서 서로 왕래하며 함께 책을 읽었다. 조선 정종 2년, 방원이 동궁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그는 당시 뜻 있는 선비를 구하다가 길재를 생각해내고는 아랫사람을 시켜 그를 불러오라고 했다.


ꡒ길재는 강직한 선비다. 내가 일찍이 함께 공부했는데 못 본지가 오래되었구나.ꡓ


길재는 몇 차례 거절하다가 마침내 옛 친구였던 방원을 만나보기로 했다. 길재가 말을 타고 도성에 이르자 방원은 그를 봉상박사(奉常博士)에 임명하였다.


으레 벼슬을 받으면 반드시 대궐에 나아가 임금께 사은숙배(謝恩肅拜)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길재는 임금께 감사의 예를 올리지 않고 방원에게 편지를 보내 벼슬살이를 할 뜻이 없음을 알렸다.


ꡒ이 몸이 옛날 저하(邸下:세자)와 더불어 태학관에서 함께 시경을 읽었는데 지금 저를 부르시는 것은 옛정을 잊지 않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고려에서 벼슬을 마치고 곧 고향으로 돌아가 여생을 마치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옛정을 생각하여 이 몸을 부르시니 제가 친구로서 저하를 뵈옵고자 왔을 뿐이오, 벼슬하는 것은 저의 뜻이 아닙니다.ꡓ


편지를 읽은 방원은 사람을 시켜 길재를 타일렀다.


ꡒ그대를 부른 것은 나지만 벼슬을 내린 것은 임금이오. 그러니 임금께 사직을 올리는 것이 옳소.ꡓ


그러자 길재는 곧 물러나 임금께 글을 올렸다.


ꡒ신은 본디 재주가 없는 몸으로 과분하게도 고려의 은혜를 입어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을 살았습니다. 신이 듣건대 여자는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고, 신하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바라옵건대 고향으로 돌려보내 주시어 신이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뜻을 이루고,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면서 여생을 마치도록 해주십시오.ꡓ


정종은 하는 수 없이 그를 돌려보내면서 부역을 면제시켜주고 밭을 하사했다. 그러나 길재는 하사 받은 밭에 대나무를 심었다.


그는 돌아오는 길에 망해버린 옛 도읍지를 돌아보고 시조를 한 수 지었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匹馬)로 돌아드니


산천(山川)은 의구(依舊)한데 인걸(人傑)은 간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고향에 돌아온 후 고을의 군수 이양(李揚)이 찾아왔다. 그런데 막상 길재의 집에 가보니 사는 곳이 외지고 논밭도 척박하였다. 그리하여 군수는 길재의 밭을 율곡동에 있는 기름진 논밭으로 바꾸어 주었다. 그러자 길재가 군수에게 말했다.


ꡒ무릇 물건이 아무리 풍족하다 한들 그 끝이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ꡓ


그러고는 전답 중에서 생계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두 돌려주었다.


세종 원년에 그는 병이 위독하여 자리에 눕게 되었다. 그때 길재의 아들 사순이 도성에서 벼슬살이를 하고 있었다. 길재의 병이 위독해지자 부인 신씨가 급히 아들 사순을 불렀다. 그러자 길재는 손을 내저으며 부인에게 말했다.


ꡒ임금과 아비는 같은 몸이오, 내 아들은 이미 임금에게 갔으니 내 부고(訃告)를 들은 뒤에 오도록 하시오.ꡓ그러고는 마침내 숨을 거두었다. 그때 나이 67세였다.




길재(吉再)와 여말삼은(麗末三隱)


1353년(공민왕2) ~ 1419년(세종1)


본관은 해평(海平)이며 자는 재보(再父), 호는 야은(冶隱) 또는 금오산인(金烏山人)이다.


아버지는 지금주사(知錦州事) 원진(元進)이며, 어머니는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추증된 김희적(金希迪)의 딸이다.


11세때 처음으로 냉산(冷山) 도리사(桃李寺)에서 글을 배웠고, 18세때는 상산사록(商山司錄) 박분(朴賁)밑에서 성리학을 배웠다. 아버지를 뵈러 개경에 갔을 때 이색. 정몽주. 권근 등 여러 선생의 문하를 오가며 학문을 익혔다. 1374년(공민왕23) 국자감에 들어가 생원시에 합격하고, 1383년(우왕9)에는 사마감시(司馬監試)에 합격하였다. 1386년 진사시에 급제하여 그해 가을 청주목사록(淸州牧司錄)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때 이방원과 한 마을에 살면서 우정이 두터웠다.


1388년 성균박사(成均博士)로 승진하였는데 태학(太學)의 생도와 양반 자제들이 모두 그에게 모여들어 배우기를 청하였다. 1389년(창왕1) 문하주서(門下注書)가 되었으나,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알고 벼슬을 버린 뒤 고향인 선산으로 돌아왔다. 이후 그를 흠모하는 학자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후학 교육에만 힘쓰다가 67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문하에서는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었는데 그 학통은 김종직(金宗直).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등으로 면면히 이어졌다. 저서로 『야은집』등이 있고, 언행록인 『야은언행습유록(冶隱言行拾遺錄)』이 전한다. 시호는 충절(忠節)이다.


그는 고려의 삼은(三隱) 중 한 사람으로 불린다. 여말 삼은은 목은(牧隱) 이색. 포은(圃隱) 정몽주. 야은(冶隱) 길재를 말한다. 세 사람의 호(號)에 각각 ꡐ은(隱)ꡑ자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야은 길재 대신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을 넣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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