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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선비정신52] 석양에 지나는 객이 눈물겨워 하노라


포천신문 기자 / jun28258@gmail.com입력 : 2007년 01월 10일

한국한시협회 포천지회장  리 효종

원천석은 함흥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시문을 공부하여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는 과거에 급제한 후 잠시 국자진사(國子進士)가 되었으나 벼슬을 탐하지 않은 채 곧 시골로 물러나 목은 이색 등과 왕래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고려가 멸망하자 그는 뜻을 함께하는 80여 명의 동지들을 모아 치악산 정상에 제단을 설치하고 단군으로부터 고려 왕조까지의 임금에게 제사를 지냈다.


일찍이 그는 이성계와 함께 공부하였고, 이방원을 가르친 스승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태종은 보위에 오른 후 여러번 스승에게 큰 벼슬을 주어 모시려 했지만 원천석은 끝내 응하지 않았다.


어느 해 태종은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치악산 밑에 은거하고 있는 스승을 찾아갔다. 그러나 원천석은 임금의 행차를 미리 알고 몸을 피했다. 그러면서 강가에서 빨래하는 할머니에게 거짓으로 말했다.


ꡒ손님이 와서 나를 찾거든 이 냇물을 따라 내려갔다고 전해주시오.ꡓ


그렇게 말한 후 원천석은 치악산 계곡으로 숨어버렸다. 태종은 그곳에서 7일 동안 머물며 스승을 찾았으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태종은 하는 수 없이 스승이 은거해 있는 치악산을 향해 절을 올리고 되돌아 왔다.


태종은 아들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후에도 다시 스승을 불렀다. 이 때에 이르러서야 원천석은 흰옷을 입고 태종을 뵈었다. 그때 태종은 여러 손자들을 불러 스승에게 보이면서 물었다.


ꡒ우리 손자들이 어떠합니까?ꡓ 원천석은 여러 손자들을 훑어보다가  한 아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ꡒ이 아이가 할아버지(태종)를 무척 닮았구려.ꡓ 그러고 나서 원천석은 다시 그 아이에게 훈계하듯 말했다. ꡒ모름지기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ꡓ


원천석이 타이른 그 아이는 훗날 단종을 살해하고 왕위를 빼앗은 수양대군이었다. 원천석은 태종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고려조의 왕궁이 있던 만월대(滿月臺)를 찾았다. 그러나 이미 왕궁 터는 황폐해져 있었다. 그는 슬픔을 가누지 못하고 시조 한 수를 지어 읊었다.




흥망이 유수(有數)하니 만월대도 추초(秋草)로다.


오백년 왕업이 목적(牧笛)에 붙였으니


석양에 지나는 객이 눈물겨워 하노라.


눈마저 휘어진 대를 뉘라서 굽다던고


굽어질 절개라면 눈 속에 푸르르랴


아마도 세한고절(歲寒孤節)은 너 뿐인가 하노라.




원천석은 여러 권의 문집을 집필하였다. 하지만 어느 날 그는 갑자기 자기 자신이 저술한 책들을 상자에 넣고 자물쇠를 굳게 채워두었다.


이윽고 죽을 때에 이르러 그는 가족을 모두 불러놓고 이렇게 말했다.


ꡒ내가 쓴 글들은 마땅히 가묘(家廟)에 감추어두고 조심해서 지키거라.ꡓ 그러고 나서 원천석은 그 상자 위에 한 구절의 글을 써 붙였다. ꡒ내 자손이 만일 나처럼 살지 않으려면 열지 말라.ꡓ


그 것은 자신의 저술 내용이 후세에 전하면 조선 왕조의 노여움을 살까 저어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유언대로 상자는 손자 대까지 자물쇠를 열지 않고 깊이 간직해 두었다. 그러나 증손 대에 이르렀을 때 명절을 맞아 가족들이 모두 모이자 가족회의를 열고 그 상자를 어떻게 할 것인지 의논하였다.


ꡒ선조께서 비록 간곡하게 유언하였으나 세월이 오래 되었으니 그 글 때문에 우리가 해를 입을 염려는 없다. 그러니 한번 열어보자.ꡓ


가족들은 마침내 상자를 열고 내용을 살펴보았다. 가족들은 원천석의 글을 읽고 나서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는  고려 역사를 기록한 문서들이 가득 들어 있었는데, 조선에서 편찬한 역사와 판이한  내용이었다. 가족들은 서둘러 상자를 닫고 숨을 멈추었다.


ꡒ이 내용은 우리 가문을 망하게 할 수도 있다. 그러니 어서 불태워 버리는 것이 낫겠다.ꡓ


그리하여 시집 다섯 권만 남겨두고, 그의 저서들은 모두 불태워지고 말았다.




원천석(元天錫)과 정선칠현(旌善七賢)


1330년(충숙왕17) ~ ?


본관은 원주(原州)이며 자는 자정(子正). 호는 운곡(耘谷)이다. 어릴 때부터 재주가 뛰어나 이름이 났으며, 학문이 해박하여 진사가 되었으나 고려 말의 정치가 문란함을 보고 개탄하면서 치악산에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부모를 봉양하고 살았다.


일찍이 방원을 가르친바 있는데, 그가 즉위하자  기용하려고 자주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태종은 원천석의 아들 형(泂)을 기천(基川:지금의 풍기)현감에 임명하였다.


그의 문집에 고려의 쇠망을 애석하게 여기는 몇 편의 시가 전해오고 있다. 그는 또 만년에 야사 6권을 저술하고 그것을 감추어두고 잘 지키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고려가 멸망할 당시 일곱 명의 절개 있는 선비가 조선의 조정에 나가는 것을 거부하고 정선 서운산 아래 동굴 속에 은거하였다고 한다. 이들을 정선칠현이라 부르는데, 전오륜. 김충한. 고천우. 이수생. 신안. 변귀수. 김위 등이다. 하지만 이색. 최문한. 전오륜. 원천석. 서진.구홍. 길재로 기록된 곳도 있다. 이때 전오륜이 망국의 아픔을 달래는 노래를 짓고 함께 불렀는데, 이 노래는 훗날 『정선 아리랑』의 모태가 되었다고 한다. 정선역 광장에 이들이 불렀다는 도원가곡비(桃源歌曲碑)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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