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정치인들은 어쩌면 자신도 모르게 삼류연극의 주연, 조연을 맡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같다. 관객에 해당하는 국민들은 그들의 연극의 저열함을 너무 잘 알고 있는데도 말이다."
요즈음 정치와 연극을 구분하기 쉽지 않다. 정치가들은 역사의 현장에 있는 현실의 인물이 아니라 마치 과거로 회귀하여 어두운 역사의 역할극의 한 인물처럼 행동한다. 경제가 어렵다는 이유로 수많은 민주인사들이 죽음과 구속의 악순환을 거듭했던 유신 시대의 역사극의 주인공 박 정희 대통령의 조역이라도 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국민들도 그 시절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마치 꿈속에서 있었던 것처럼 인식한다. 야당의 대통령 후보 중 한 여성은 박대통령의 영애로서 그 시절의 정치에 대한 부분적인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신정치가 마치 대단한 영광의 시절이라도 되는 양 미화하고 있다. 또 한 대권주자는 박대통령의 업적중의 하나인 고속도로를 본 따서 전국을 운하로 엮어보겠다고 나서고 있다. 우리 모두가 추억은 아름다울 뿐이라고 어설픈 유행가를 부르고 있다는 착각이 든다. 물론 수많은 인권유린과 억압의 정치가 경제적 보상으로 돌아와 현재의 풍요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북한의 인권유린 못지 않게 어두움의 철권통치에 몸서리를 치고 새벽이 오기를 기다리지 않았던가. 그 모든 억압이 단지 꿈이기를 원하며 새로운 시대가 열리기를 염원하지 않았던가 말이다. 아무리 지금이 민주와 비민주의 양분론으로 논하기에는 어려운 탈냉전시대이지만 말이다.
셰익스피어의 ꡒ말괄량이 길들이기l"의 서극에는 현재의 우리가 겪고 있는 꿈과 진실의 혼돈의 연극을 보여준다. 슬라이라는 친구는 술주정뱅이로 항상 술집에서 만취하여 행패를 부리는 자이다. 그는 술김에 깨뜨린 유리 값을 내라는 술집 여주인에게 자신의 조상이 리쳐드 정복자와 함께 조국에 공을 세웠다고 둘러대며 허풍을 친다. 그는 결국 현실의 고통을 잊으려 술을 마셔댄 뒤 골아 떨어진다. 마침 사냥을 나왔던 영주가 만취되어 쓰러져있는 슬라이를 발견한다. 그는 순간적으로 슬라이에게 장난을 치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는 부하들에게 슬라이를 좋은 옷을 입혀서 자신의 집에 옮겨놓은 뒤 술이 깨면 영주님이라고 호칭하라고 명한다. 땜쟁이 주제에 갑자기 영주로 둔갑한 자신을 두고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보고 즐기려는 속셈인 것이다. 연극을 좋아하는 영주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시동 하나를 영주부인으로 분장을 시켜서 가짜 영주 슬라이의 부인으로 역할을 하도록 명하여 슬라이를 십오년 동안이나 꿈에서 깨어나지 못했다가 돌아온 것으로 조작한다.
그가 부인 역할의 시동에게 주문하는 대사는 ꡓꡐ대감, 무슨 분부라도 있으시다면 말씀하여 주셔요. 당신의 정부인이요, 조강지처인 제가, 아내된 의무를 다하여, 진정을 표시해 보여 드리려 하는 것이오니ꡐ하고 . . . 그 눈물이란 칠년 동안이나 가련하고 더러운 거렁뱅이나 다름없이 되었으라고 생각되었던 고귀한 낭군께서 건강한 상태로 회복된 것을 보는 기쁨의 눈물이라고 말하라 해라. 만약에 그 애가 마음대로 소낙비 같은 눈물을 쏟는 여자만이 가지고 있는 타고난 재주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양파로서 그 가능을 대신하게 하란 말이다. 즉, 양파를 수건에 싸서 눈에다 비벼 대면 어쩔 수 없이 눈물은 나오고야 말 것이다.ꡒ라는 허무맹랑한 것이다. 슬라이가 잠에서 깨어나 영주가 연출하는 각본대로 시행하였을 때, 처음에는 대감이란 호칭은 천부당만부당한 것으로 부인하던 그도 점점 자신이 진짜 영주라고 믿게 된다. 땜쟁이라는 실제는 십오년의 꿈 속의 내용이었고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안되는 영주라는 현재가 실제라고 보는 것이다. 남이 억지로 쓰게 한 영주라는 마스크가 자신도 모르게 이루어진 연극 속의 역할인데도 말이다. 이렇듯 연극이나 꿈 그리고 실제는 구분하기 힘들다.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실제 상황이라도 꿈보다 못한 연극의 한 장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슬라이가 영주역을 하면서 가장 절박하게 하고자 하는 것은 꿈속에서나 보던 아름다운 여인으로 나타난 부인과 잠자리를 하고 싶은 것이다. 이 또한 영주 연출의 연극인 줄 모르는 슬라이의 탈선적 연기이다. 연극은 사랑의 연기를 통해서 관객에게 실제 사랑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픽션에 불과한 것임을 모르는 것이다. 부인역할의 시동이 그가 오랜 병에서 깨어났기 때문에 절제해야 한다고 달래자 ꡓ말괄량이 길들이기ꡒ란 연극을 함께 보는 것으로 만족한다. 셰익스피어는 인생이 얼마나 많은 연극에 둘러싸여 있는 가를 보여주기 위해 영주 연출의 연극에 참여하고 있는 슬라이에게 또 한편의 연극을 보게 함으로써 관객에게 인생의 연극성을 철저하게 보여준다.
요즈음 정치인들은 어쩌면 자신도 모르게 삼류연극의 주연, 조연을 맡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같다. 관객에 해당하는 국민들은 그들의 연극의 저열함을 너무 잘 알고 있는데도 말이다. 대한민국은 어두웠던 유신시대와 군사정권의 터널을 가까스로 나와서 국민의 정부와 참여 정부라는 두 개의 거친 광야와 파도가 높은 바다를 가로지르고 또 항해를 마무리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적어도 일제 시대에 조선 땅에 문명의 이기가 들어왔으니 그 시대가 좋다느니. 그립다고 하는 제국주의적 순응주의자들이 이제 더 이상 역사의 주인공이 아니듯이, 개발독재시대가 경제적 성공을 했으니, 그 시대가 지금보다 국민의 삶의 질이 좋았다고 평가하는 몽상주의자는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은 이제 전체주의적 정치에 의해서 개인적인 자유와 정의를 희생할 수 없다는 의식이 확고하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