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병자호란시의 포천 (오성과 한음의 고장) 포천은 서울 이북 함경도로 통하는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어 왜군의 주력부대가 통과하게 됨으로써 많은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포천은 임란을 극복하는데 큰 공을 세운 인물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오성부원군 이항복은 임란 때 선조를 의주로 호종하고 근왕병의 모집에 힘쓰는 한편,명나라의 원군을 맞이하는 원접사로 활동하였으며 임란 기간 중 병조판서를 다섯 번이나 제수받는등 많은 활약을 하였다. 또한 임난이 끝난 후에는 난의 뒷수습에도 큰 공을 세웠다. 이덕형은 원래 양근(양평)사람으로 외가가 포천 자작동으로 포천에서 태어났다. 명나라에 건너가 구원군의 파견을 성공시켰으며, 원군이 들어온 후에는 이여송의 접반관으로 전쟁중 줄곧 그와 행동을 같이 하였다. 이어 훈련도감 당상으로 군사의 조련과 정비에도 공을 세웠다. 이항복과 이덕형은 어렸을 때 포천에서 만났을 뿐만아니라 벼슬길에도 거의 같이 나가 구국의 일념으로 일한 우국충절의 인물이다. 후세 사람들이 “오성과 한음”을 희화(戱畵)시킨 이야기들이 많이 전해지고 있으며 많은 설화를 남겼다. 이들이 남긴 문화재로는 이항복묘소및 신도비. 화산서원. 용연서원등의 귀중한 문화재를 남겼다. 권종은 임란이 일어나던 해 금산군수로 부임하여 병졸 수백명을 모집하여 의병장 고경명·조헌에게 지원을 요청한 뒤 대거 내습해 온 적과 격전 끝에 순국하였다. 금산에 순의비(殉義碑)가 세워져 있으며, 후에 충신문의 정려를 받았으며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이성길은 경성(鏡城)에서 정문부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길주성·명천·쌍포 등지에서 왜적과 싸워 대승을 거두었고, 그 공으로 수성도 찰방에 임명되었다. 황정욱은 호소사(號召使)로 왕자 순화군(順和君)을 배종하여 강원도에 들어가 의병을 소집하는 격문을 8도에 돌렸으며,회령에서 모반자 국경인에 의해 임해군·순화군 두 왕자와 함께 왜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이듬해 부산에서 석방되어 돌아왔다. 병자호란 때 공을 세운 포천의 대표적 인물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조득남은 병자호란 당시 만호(萬戶)로서 이시백의 수하에서 인조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에서 자원하여 출전하여 많은 전과를 냈으며 ,계속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후에 관작이 추증되고 정려(旌閭)를 받았다. 이시백은 병자호란 때 서성장(西城將)으로 남한산성의 수비를 담당하였고, 청나라와 화의를 반대하는 척화신(斥和臣)으로 몰려 아들을 볼모로 청나라에 보내기도 하였다. 이 밖에도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때 인조를 호종한 서성, 병자호란 때 인조를 호종한 이항복의 아들인 이성남, 그리고 정지상·이영 등이 있다. 대체적으로 포천은 인물이 많이 낳았고 영평은 뛰어난 산수로 시인 묵객들이 많이 찾는 고장이었으며 영평은 영평팔경이라는 절경의 이름이 기내(畿內)에 유일하다. ‘영평팔경’이란 말은 사가정 서거정문집에 나타나며 선조조의 명재상 박순이 이곳 창옥병으로 퇴은하며 영평팔경의 경치를 시로 남기고 있으며 이곳에서 생을 마치며 옥병서원과 신도비. 묘소를 남기고 있다. 이런 연유로 포천은 동인이 많이 살았고 영평은 서인이 많이 찾은 곳이다. 조선왕조에서는 임금님이 하루 행행(行幸)거리를 약8십리로 제한하였기 때문에 포천지역에는 왕능은 없다. 가장 가까운 능은 남양주시에 위치하는 광릉이 있다. 눙엔 정자각이라하여 능침이 있는데 이곳은 임금이 전일 도착하여 쉬며 잠을 자는 침전(寢殿)이다. 포천에는 그러나 선조의 12번째 왕자인 인흥군묘소와 별내면에서 이장해온 인평대군묘소. 철종의 생부인 전계대원군 묘소가 있으며 포천의 문화와 인물에 많은 영향을 준 인물이며 문화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