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의 사대비극 중에서 가장 긴장도가 높은 작품이 「오델로」이다.
오델로는 흑인으로 국가를 위해 전공을 세우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를 맞는 행운아이면서도, 질투에 눈이 멀어 죄 없는 아내를 자기 손으로 죽이는 가장 불운한 사나이기도 하다.
우리는 흔히 사랑하기 때문 에 헤어진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어쩐지 논리가 안 맞는 말인데, 그런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게 문제다.
본인이 도산하게 되어서 사랑하는 가족이나 상대방을 구출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부부나 가족을 해체하는 경우가 있다.
또는 더 좋은 조건의 파트너를 만나서 행복하게 살라고 양보하는 천사표 연인들도 있다.
자신을 죽여서 남을 위한다는 살신성인의 거룩한 마음이 있으니 그 것도 살 맛 나는 이야기일 수 있다.
헌데 오델로의 경우는 문제가 다르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토록 죽도록 사랑하는 사람을 죽여야 한다는 것은 도저히 가능할 것 같지 않다.
자기를 두고 다른 사람을 선택하는 여자를 복수심에 사로잡혀 살인을 범하는 작자들은 종종 신문 사회면에 등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오델로는 이태리 사회의 최고 미인인 데스데모나를 아내로 삼게 되는 행운을 얻었을 뿐 아니라 그녀의 존경과 사랑을 마지막까지 듬뿍 받는데도 불구하고 그녀의 목을 조른다.
단지 아내가 부관 캐시오와 부정을 저질렀다는 악독한 부하 이아고의 거짓 밀고만을 믿고 말이다.
사실 좀 냉정하고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이아고의 고자질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논증하는 절차를 밟아보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왜 오델로는 그런 끔찍한 살인을 저질렀을까.
그가 아내를 사랑하지 않아서인가.
아니면 아내가 그를 배반해서인가.
그 어느 쪽도 아니다.
오델로는 단지 자신의 사랑의 지고성을 담아 선물한 손수건이 부관 캐시어스의 손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아내의 부정을 단정 짓고 만다.
캐시오는 검둥이 주제에 뭇 백인 남성들의 선망의 대상인 데스데모나를 오델로가 선점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오델로를 파멸시키기로 작정한다.
그는 오델로의 판단력을 보좌할 케시오를 제거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한다.
그는 파티석상에서 술에 약한 캐시오에게 술에 취하게 만들어, 자동적으로 싸움에 휘말리게 만든다.
정황을 모르는 오델로는 캐시오의 죄를 물어 부관에서 파직함으로써 이아고가 앞으로 벌일 모함의 게임에서 무장해제 되는 상황을 스스로 만든다.
이아고는 아내로 하여금 데스데모나의 방에서 손수건을 훔쳐서 캐시오 방에 떨어뜨려놓고, 오델로를 유도하여 손수건이 있는 현장을 목격하게 만든다.
자상한 데스데모나가 캐시오의 복직을 부탁하는 청탁은 더 이상 선의의 부탁이 아니라, 연인의 구원을 위한 파렴치한 여인의 수작으로 전락하고 만다.
오델로의 활화산은 질투심이 발동할수록 쉽게 타오른다.
그 불이 타오르면 오델로의 이성의 힘은 작동을 멈추고 가슴 속에 끓고 있는 정열의 화산이 활활 타서 재가 될 때까지 방관할 수밖에 없다.
수많은 전장에서 그토록 용감하고 전술에 능했던 오델로가 한낱 생쥐 같은 이아오에게 조종되고 속아서 자신의 삶과 사랑하는 여인 데스데모나를 파괴할 수밖에 없단 말인가.
흑백의 인종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오델로의 내적인 장점을 발견하고 사랑으로 발전시킨 데스데모나의 이상주의적 사랑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사람이란 모두 한 가지정도 남에게 숨기고 싶은 비밀이나 약점이 있다.
그 것은 심리적인 컴플렉스일 수 있고, 또는 사회적 편견에 대한 정신적 상처일 수 있다.
일전에 미식축구 영웅이 된 워드의 방한을 두고 얼마나 많은 한국인들이 자신이 가졌던 흑인이나 혼혈인에 대한 편견이 잘못되었던 것인가를 두고 반성한 바 있다.
그 것은 한 개인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순종주의를 고집하는 한국사회가 이아고 같은 잔인한 행위를 그 오랫동안 저질렀던 것이다.
오델로가 백인 우월주의 사회에서 단마필기로 성공을 하였다 하더라도 소외된 개체로서는 자신의 약점에 관련된 사안에 대해서 정상적으로 대처할 수 없는 잠복해있는 열등감이 그의 강한 열정과 결합하여 불가사의한 형태로 발전해버렸다고 여겨진다.
이아고의 비열한 협잡은 한국사회에 여러가지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아무리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지역공동체에 몸을 담고 살아가는 많은 이웃들을 자신의 텃밭에 침입한 텃밭을 침입한 적으로 여겨서는 그 사회가 건전하게 지탱될 수 없다.
포천 같은 소도시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타지역에서 오델로 같은 생산적인 인력과 자원이 가능한 많이 유입되어야 한다.
포천에 공헌하는 유입 인력이나 자원이 소외를 받거나 편견으로 가슴앓이를 하고 있다면 포천의 미래는 없는 것이다.
명분 없는 지연, 학연 등을 들먹이며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지역공동체에 정착하여 뿌리를 내리려고 하는 이웃을 이아고처럼 칼을 세우고 위협한다면 그건 분명 병든 사회이며 닫힌 사회이다.
또한 그런 사회는 미래의 개방시대에는 적응하기 어려운 지역으로 낙인이 찍히고 말 것이다.
우리는 가슴에 손을 대고 자문해야한다.
진정 나는 인종주의, 지역주의, 학벌주의 등의 모든 편견으로부터 해방된 자유인인가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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