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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 선비정신20]한국한시협회 포천지회장 리효종

조헌(趙憲)과 금산(錦山)의 칠백의총(七百義塚)
포천신문 기자 / jun28258@gmail.com입력 : 2006년 02월 01일


리 효 종
포천한시사 대표


조헌은 선비의 몸으로 높고 깨끗한 인격과 바르고 참된 학문을 지녔던 사람으로서 적의 침략 앞에 끝가지 조국을 지키려는 정신, 커다란 목적을 위하여는 온갖 사사로움을 버리고 오직 하나로 뭉치는 정신, 글에서 배운 바를 몸소 실천하는 정신, 그리하여 나라와 겨레의 제단에 아낌없이 몸을 던져 영원히 삶을 얻은 그 정신 그 행동은 오늘에도 내일에도 마냥 빛나는 거울이 아닐 수 없다.

태산보다 무거운 의리가 있고 터럭보다 가벼운 목숨이 있다는 옛말이 있다. 의로움이 아니면 백년을 사는 목숨도 치사하고 때와 곳을 가려 진실로 의로움을 얻은 생명이라면 짧아도 영원한 삶이다.

의로움에 목숨을 던져 구원(久遠)의 생명을 얻은 거룩한 인물 율곡 이이(栗谷 李珥)의 문인 중 가장 뛰어난 학자의 한사람으로서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하며 율곡의 학문을 계승발전 시켰다.

소년(少年)의 의지(意志)
1548년(명종3) 어느 봄날 김포(金浦) 서감정리(西坎井里)의 큰길가에 있는 한 정자에서 마을 아이들이 글을 읽고 있었다.

때마침 정자 아래의 대로를 위의를 갖춘 높은 벼슬아치의 행차가 지나가니 글을 읽던 아이들이 다투어 이 요란한 행차를 구경하려고 달려 나왔다. 그러나 겨우 다섯 살이나 되었을까 한 어린이는 그대로 앉아 글을 읽고 있었다.

지나가던 벼슬아치가 이를 보고 기특히 여겨 정자에 올라가 "다른 아이들은 모두 나의 행차를 구경하는 데 너 만은 왜 그냥 있느냐"하고 물었더니 그 아이는 "오로지 글 읽기에만 마음 쓰라는 아버지의 말씀이 있습니다." 하고 의젓이 대답하는 것이었다. 이에 감복한 벼슬아치는 그 아이의 아버지를 만나 "우리나라에 참다운 학자가 또 하나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려"하고 칭찬하면서 극진한 예슬 올리고 떠났다 한다.

태평세월이 계속 되었더라면 그 벼슬아치의 말대로 진실로 참다운 큰 학자가 되었을 지도 모를 일이었건만 이 아이는 자라서 역사상 전에 없었던 큰 난리(壬辰倭亂)을 만나 의병을 일으켜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싸우다가 장력히 전사하였으니 이가 유명한 의병장 중봉 조헌이다.

조헌의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峯) 후율(後栗) 도원(陶原), 본관은 백천(白川), 응지(應祉)의 자이다.

열두살 때 어촌(漁村) 김황(金滉)에게 글을 배웠는데 가세가 어려워 밤에는 방에 불을 지피면서 그 불빛으로 글을 읽었으며 밭에 나가 일할 때는 밭두렁에 책걸이를 만들어 책을 얹어 놓고 틈나는 대로 글을 읽었다 한다.

그가 스므살이 되던 때의 일인데 서울을 다녀오던 길에 양천강(陽川江)을 건너다가 심한 풍랑을 만났다. 이때 배안의 사람들이 모두 당황하고 어찌할 바를 몰랐으나 그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배가 겨우 강을 건넌 뒤 일행이 그의 너무나 무관심하던 태도를 나무라자 그는 말하기를 "죽고 사는 일은 모두 명에 달려 있는 것인데 날뛰고 울부짓는다고 죽음을 면할 수 있겠소"하며 태연하게 말하였다 한다.

1565년(명종20) 성균관에 진학하였다. 문정황후가 섭정하던 시절 불교를 지나치게 믿어 많은 잡음을 일으켰던 이 때 성균관 학생이 된 조헌은 동료들과 함께 보우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고 대궐 앞에 엎드려 있었으나 왕의 응답을 얻지 못하자 동료들 중 물러가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는 그는 자리를 뜨지 않고 버티었으니 그의 강직한 성격은 이 때 벌써 나타나 있었다.

굽힐 줄 모르는 성격

성균관에서 공부한 조헌은 1567년(명종22) 식년문과에 급제, 교서관(校書館) 부정자(副正字)에 있다가 파주목(坡州牧) 교수로 전임되었으며 파주에 있을 때 대학자 우계 성혼(牛溪 成渾)을 찾아가 스승으로 모시기를 청하였다.

이 때 그 보다 아홉 살 위였던 우계는 그의 학문을 높이 평가하고 친구로 대하였다. 조헌은 우계를 만난 다음 다시 율곡 이이(栗谷 李珥)를 찾아가 그의 가르침을 받았으니 이들 두학자와의 교제는 앞으로의 그의 생애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후로는 기호학파(畿湖學派)의 맥을 이은 학자로 지칭되었다.

지방관으로 전전하던 그는 1572년(선조5) 교서관 정자(校書館 正字)로 임명되었다. 불교행사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삭직되어 학문에 전념하였는데 그후 저작(著作)에 임명되었다.

또다시 불교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왕의 노여움을 샀다. 이때부터 그의 굽힐 줄 모르는 성격이 널리 알려져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고 박순(朴淳), 노수신(盧守愼), 유성룡(柳成龍), 김성일(金誠一)등과 사귀었다.

1574년(선조7) 성절사(聖節使)와 같이 명나라에 다녀온 후 교서관 박사, 호조·예조좌랑, 성균관 전적, 사헌부 감찰 등을 역임하고 통진현감으로 나갔다.
처음으로 수령직을 맡은 그는 지정으로 백성을 돌보고 폐단을 없애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모함을 받아 부평에 유배되었다.

귀양에서 돌아온 후 황해도 석담(石潭)으로 율곡을 찾아가 학문을 배우며 자연을 즐기다가 1581년(선조14) 공조좌랑, 이어서 전라도 도사(부지사격), 종묘 서령(宗廟 署令), 보은 현감 역임.

1584년(선조17) 공주목 교수(公州牧 敎授)에 임명. 당시는 당쟁이 심하던 시기였다. 당시 정권을 잡은 동인(東人)이 이이(李珥), 성혼(成渾), 정철(鄭撤)등이 정치를 그르쳤다고 추죄(追罪)하려 하자 이를 배척하며 동인의 정여립(鄭汝立)이 장차 반역을 도모할 것이라는 극언까지 하였으나 아무런 응답이 없자 관직을 버리고 옥천(沃川)으로 내려갔다.

옥천에서 인재양성의 불비점을 거론하고 인재양성 방법 4조를 진언하였다. 이어서 일본과의 교섭을 반대하고 정치를 그르치는 동인들을 비방하는 과격한 상소를 올리니 왕이 크게 노하여 상소문을 불사르게 하였다. 그러나 그는 굽히지 않고 이듬해 다시 도끼를 들고 대궐 앞에 나가 또 상소를 올리다가 길주(吉州)로 정배 되었다. 귀양살이를 하면서도 자기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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