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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의 선비정신·18]송강 정철(松江 鄭澈)

리효종 포천한시사 대표
포천신문 기자 / jun28258@gmail.com입력 : 2006년 01월 13일

<전호에 이어서>
▶1568년(선조1) 홍문관 교리, 사헌부 지평
▶1575년(선조8) 동서분쟁이 심하므로 벼슬을 버리고 귀향
▶1576년(선조9) 왕의 부름을 받고 조정에 나와 직제학이 됨
▶1578년(선조11) 승지에 임명


이때 유학은 제2기에 들어가 퇴계는 산림(山林)에서 율곡은 조정에서 유학계의 두 봉우리를 이루어 유학의 황금기를 이룬 시대이었다. 아울러 동서분쟁이 태동되는 시기였다.

송강은 대쪽같은 성격으로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벼락이 떨어져도 할 말은 다하는 까닭으로 상대방과 융합되지 않아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이때 율곡도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성산에 가있는 동안 여러번 벼슬자리를 내렸으나 응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성산에서 자연과 시(詩)속에 파묻혀 어지러운 정치기류에 시달린 몸과 마음을 쉬고 있었던 것이다.

1580년(선조13) 45세 되던해 강원도 관찰사에 등용되자 이번만은 어명을 어기지 못하여 부임하였다. 당시 송강에 대한 선조의 총애는 남다른 바가 있었다.

반대파로부터 많은 모함이 있었다. 이럴때마다 송강은 청직함과 충성된 마음을 잘 알고 있는 선조는 이렇게 타이르는 것이었다. 정철은 마음이 바르고 그 행동이 나무랄 데 없다. 다만 그 말이 곧을 뿐이다. 그의 사람됨과 그 충직한 마음을 잘 알고 있던 선조는 반대당의 빗발치는 상소를 물리치고 송강을 가까이 불러 들이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동인이 득세하고 있는 때이어서 조정에 두지 않고 지방의 방백으로 보낸 것이다. 이리하여 송강은 이때부터 강원도, 전라도, 함경도관찰사를 역임한 것이다.

결벽한 성격으로 말과 행동이 청직하여 사람들을 널리 정치적으로 포합하는 데는 적합하지 않으나 술과 풍류와 시로써 범속을 벗어난 송강은 지방을 다스리는 장관으로서 보다도 한 시인으로 관동의 절경속에 묻혀 살 수 있다는 기대와 선조의 총애에 대한 고마움으로 기꺼이 관찰사의 직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때 그의 천재적 재질을 나타내 우리 문학사에 불후의 명작 관동별곡(關東別曲)과 포고문이나 유시문을 대신하여 백성을 교화하고 민속을 순화하는 훈민가(訓民歌) 16수는 시조형식을 빌어 지은 것으로 높이 평가된다.

1583년(선조16) 예조참판, 이어서 형조와 예조판서 역임.

1584년(선조17) 대사헌에 임명, 율곡이 별세하니 동인들의 천하가 되자 사표를 내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나이 50세 인생의 내리막 길에 다다른 송강은 어지럽게 걸어온 관계의 생활에서 물러나 조용히 자연과 벗하면서 원속한 경지에서 창작활동에 몰두하였다.

사미인곡(思美人曲), 속사미인곡(續思美人曲), 성산별곡(星山別曲) 등의 장가와 다가가 쏟아져 나온 것도 이 무렵이다. 조정에서 물러나와 있으면 있을수록 임금에 대한 그의 충정은 끝없는 그리움으로 나타났다.

1589년(선조22) 우의정으로 발탁되어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을 다스리고 서인의 여수가 되었다.

1590년(선조23) 좌의정에 승진, 1591년(선조24) 왕세자 책봉문제가 제기되자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와 같이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하기로 했는데 이산해의 계략에 빠져 혼자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했다. 이때 신성군(信誠君)을 책봉하려던 왕의 노려움을 사서 진주로 유배, 이어서 강계로 이배되었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 왕이 몽진길에 개성에 이르렀을 때 노인들이 국난시기에 정정승을 석방하여 나랏일을 맡아 보도록 하라는 진정으로 정정승을 석방토록 하였을 뿐 아니라 충효대절(忠孝大節)이 지극한 경이여 되도록 빨리 내가 있는 곳으로 달려오라고 하였다. 이산해는 파면되었다.

송강은 달려와 왕을 호종, 의주까지 모시었다.

의주 행재소에서 있었던 일화가 있다. 송강이 유성룡과 같이 왕을 모시고 있는데 인빈김씨(仁嬪金氏)가 인절미를 마련하여 올리었다. 왕과 다른 사람은 귀한 것이라 하며 인절미를 들었는데 송강은 인빈을 보고 만백성이 굶주리고 있는데 어찌 우리가 이것을 먹을 수 있느냐 하고 자리를 떠나 버렸다. 인빈은 무안해하며 그간 피난길에 상감을 비롯한 대신들이 굶구리고 있어 찹쌀이 한되 생기어 떡을 만들어 진상하였는데 송강이 이렇게 망신을 주느냐고 하며 울었다. 송강의 대쪽같은 바른 소리였다.

그 다음날 송강은 체찰사(體察使)에 임명되어 기호(畿湖), 호남(湖南) 지방을 순무하라는 명이 내렸다. 일본군은 아직도 평양이남을 점령하고 있는데 체찰사라는 직무는 다시 죽음의 땅으로 들어가는 일이었다.

1593년(선조26)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들어갔다가 11월에 돌아왔다. 송강이 돌아오자 동인들의 모함을 받아 사직하고 강화의 송정촌(松亭村)에 우거하면서 만년을 보냈다. 청렴하고 결백했던 송강은 다만 그 곧은 혀와 뜨거운 피로 인해 늘 피해를 입었다.

당대 가사문학(歌辭文學)의 대가로서 시조(時調)의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시)와 더불어 한국 시가사상(詩歌思想) 쌍벽으로 일컬어진다.

반대파의 끈질긴 모함으로 사후에 관작이 추탈당했다가 1609년(광해군1) 신원복관 되었다.

창평의 송강서원(松江書院), 연일의 오천서원(烏川書院)에 제향되고 시호는 문정공(文靖公)이다.

포천신문 기자 / jun28258@gmail.com입력 : 2006년 01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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