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 취재하면서 우리의 문화와 전통을 발굴하는 일은 흔치 않다. 대부분은 유형의 흔적과 유구를 일부 발견하지만, 전국적으로도 희귀한 무형의 문화재를 발견하는 것은 천우신조라고 할 수 있다.
정확한 사료가 없어서 알 수 없지만, 포천 유일의 부락창가(唱歌)를 소개한다. 유일한 전승자인 이상익 옹은 오래된 마을(용상골)의 토박이로 현재까지 전곡을 기억하고 가사까지 알고 있는 유일한 분이다.
대한제국 말에 발생한 창가 형태의 4절까지 전곡을 기억하고 있으며 계승자가 없어 사라질 운명이다.
창가는 개화기 시가 양식의 하나로 개화기의 한국 시가는 서구의 충격을 받아서 그 내용과 형태에서 고전시가와는 다른 모습을 띠기 시작하였다. 창가는 개화기 시가의 전개 과정에서 나타난 양식으로 개화 가사의 다음 자리에 위치하고, 다음 단계의 시가인 신체시의 형성과 전개에 징검다리 구실을 하였다.
이 시기의 창가는 대체로 세 종류의 유형으로 나누어 이야기될 수 있다. 제1단계인 개화기에는 민간단체가 우후죽순처럼 나타나고, 그들은 또한 조직구성원들에게 조직의 성격과 취지를 알리고 단합심을 고취하기 위하여 단체가를 만들어 부르도록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개항 이후 우리 주변에서는 정부와 민간에 두루 자주독립과 애국·애족의 기운이 팽배하여 그러한 내용을 담은 노래가사가 양산되었다.
애국가류나 단체가에 속하는 창가는 이러한 기운에 힘입어 널리 제작되었다. 또한, 이때의 창가는 대개 그 내용이 진보·개혁의 열망이나 문명·개화의 추구를 염원한 쪽으로 기울어졌다. 그 말씨도 애국가류나 단체가보다는 간결한 것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