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교4리는 국도 43호선이 이동교리의 남쪽에서 북쪽으로 지나며, 송우 가구 거리가 형성되어 있으며 자연 마을로 아래용상골·용상골·윗용상골로 예전엔 용상골이었다가 아래용상골·용상골이 분리되었다.
용상골이라는 이름은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용상골에서 유숙할 때 군사들이 막을 치던 곳에서 연유한 이름이며 안쪽에 있는 윗용상골이 마을의 모태로 일본강점기 때에는 모범부락으로 포천시에서 최초로 초등학교가 개교됐으며 현재의 송우초등학교가 이전하기 전에 용상골에 학교가 있었다고 했다.
이러한 연유로 포천지역에서 제일 먼저 개화되었으며 초기엔 이 씨 집성촌으로 마을이 형성되었고 조선 시대에는 진사가 거주하는 양반 동네였다고 한다.
마을이 산 아래에 위치하여 자녀들이 출가하면 아랫마을로 이주하여 가구 및 주민 수가 많지 않았다고 하며 옛날에는 마을 자치법규가 있어서 해방 후에도 일정 기간 지속했지만 현재는 외지인의 유입으로 사라졌다며 안타깝다고 했다.
올해 82세의 이상익 경로당 회장은 80세 이상 마을주민 중에서 유일한 토박이며 마을의 역사와 전통 등을 유일하게 알고 계신 분으로 살아있는 무형문화재라고 할 수 있다.
인터뷰 중 우연히 흘러나온 마을 창가(唱歌)를 4절까지 완벽하게 기억하고 있는 유일한 분이었다. 이상익 회장은 본인이 알기에 포천에 유일한 마을 창가라며 기자에게 노래를 들려주었고 기자는 천우신조로 완창한 노래를 완벽히 녹음하고 가사를 녹취할 수 있었다.
기자가 생각하기에 포천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충분하며 복원하여 전통을 이어갔으면 하는 바램과 한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사라져가는 문화재를 발견한 느낌이다.
이렇듯 역사가 오래된 마을임에도 불구하고 외지인의 유입으로 현재 마을은 100여 호로 주민 수가 늘고 동네 정면에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입주했으며 한편에는 신규 빌라촌과 공장이 에워싸고 있다. 마을 뒤편에는 장면 부통령 묘가 있다.
이상익 회장은 어렸을 적 소나무 숲이 우거져 울타리처럼 동네를 지켜줬다며 이젠 두어 그루의 흔적이 남아있다며, 회원이 적고 농토가 부족하여 넉넉하지 않은 동네라고 자랑할 것은 없다는 회장님의 말투에는 아직도 조선 양반의 선비다운 기운과 기품이 남아있었다.
이상익 회장은 이젠 여성회원 14명과 남성회원 3명 등 총 17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지만 사라져가는 마을 규범을 지키고 동무들이 가까이 있어 항상 감사하는 마음이라며 회원들이 농사일로 인해 장수하는 회원이 적다며 동무들의 건강을 걱정하며 자리를 정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