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에서 조선 전기 포천출신학자이자 정치가로 이름을 날렸던 독곡 성석린의 '독곡집' 초간본이 발견됐다.
성석린 선생은 태종 7년에 국정에 관한 ‘시무20조’를 만들어 올린 인물로 유명하다. 그중 제7항에 보면 ‘항상 우리의 근심이 되는 것은 왜노입니다’라는 대목에서 조선조 최초로 일본을 경계한 선견지명을 평가한 인물이기도 하다.
성석린 선생의 문집은 세종이 경영관에 지시해 14여 년 만인 세조원년에 완성된 책으로 임금의 명령으로 개인의 문집이 만들어진 유일본이다. 하지만 위의 ‘왜노’라 표현한 대목 때문인지 임진왜란 때 일본이 선생의 문집을 빼앗아가 현재는 국내에는 존재하지 않다고 밝혀진 바가 있다.
현재 이 책은 국내에 3곳, 외국에 1곳 총 4곳에서 소장하고 있는데, 고려대 만송문고는 1460년에 중간된 목판본을, 성균관대 존경각은 1919년에 삼간된 목활자본을, 일본 봉좌문고는 1456년 초간된 목판본을, 국립중앙도서관은 1989년에 봉좌문고본을 영인한 판본을 각각 소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동안 국내에는 초간본이 없다고 단정한 포천출신 성석린의 '독곡집' 초간본 상권을 소장하고 있다는 제보는 초간본이 일본에 있는 것이 유일본이 아니라는 것에 힘을 실어 넣었다.
소장자에 의하면 한국고전번역원의 '독곡집' 해제 및 편찬에 따르면 1456년, 1460년, 1919년 무도 3번에 걸쳐 '독곡집'이 각각 판각됐다고 한다.
1919년의 삼간본은 목활자인 반면, 1456년의 초간본과 1460년의 중간본은 모두 목판이다. 이 둘 목판의 차이는 ‘사주쌍변’과 ‘사주단변’의 테두리 형식에서 나뉜다. 나머지 글꼴 및 체제 등은 똑같다.
사면의 테두리가 모두 복선이면 사주쌍변이고 단선이면 사주단변이다. 따라서 첫째에 해당되면 자연히 초간본이고 아니면 중간본인데, 제보자에게 소장된 문집은 물론 사주쌍변에 해당된 초간본이다.
또 훗날에는 평양부에서 처음 간행된 문집을 평양본이라 말하고 진주부에서 다시 간행된 문집을 진주본이라 말한다.
한편, 성석린은 태종원년 함흥에 가 있는 태조를 설득해 돌아오게 하고 이듬해 영의정에 임명된 인물로, 2년 만에 사은사로 가면서 사은사의 격에 맞게 직위도 스스로 강등한 참된 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또 그가 쓴 ‘시무20조’에는 농한기 성을 수리, 서북방의 요충지인 평양의 부윤과 도순문사의 적임자 선출, 백성을 3~4호 단위로 인보를 삼고 그중에 믿을 만한 사람을 책임자로 삼아 수시로 연락하게 해야 한다는 등 국정의 전반적인 것에 대한 것을 올렸으며 왕조시대 국책으로 거의 완벽에 가깝다는 평이다.
성석린 선생의 묘는 포천시 신북면 고일2리 산30에 소재하고 있으며, 1986년 4월 포천시 향토유적 제22호로 지정돼 있으며, 고려시대 양식을 계승한 조선시대 초기 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전형적인 예로, 당시 묘제와 석물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됐다.
한편, 고전번역원 전 교수이자 한학자인 성백효 선생이 자기 문중(창녕성씨)의 선현인 성석린의 '독곡집'을 번역 및 신용남의 해제에 따르면 이미 초간과 중간의 차이를 자세히 밝힌 바 있다. 따라서 고려대 도서관이 소장한 '독곡집'은 확실히 중간본임에도 여전히 허위정보를 그대로 노출시켜 수정하지 않고 있다. 이번 발견으로 학교 측은 이에 관한 정보수정이 시급하다고 주장한다.